이스라엘 왕국은 대체로 기원전 12세기에 탄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구약성경에 따르면 사울 왕(기원전 1020~1000년)이 이 나라의 초석을 다졌으며,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기에 전성기를 맞이한 뒤 분열과 외세의 침략이라는 격변의 시기를 거치게 됩니다.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와 같은 강대국에 필적할 만한 국력은 아니었지만, 고대 이스라엘 왕국은 인류 역사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습니다. 주변 민족들과 달리 히브리인들은 유일신 야훼만을 숭배했는데, 그들의 종교는 이후 기독교와 이슬람교 모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성경에 기록된 땅
유대 민족의 역사와 건국 신화는 성경에 담겨 있으며, 성경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온 이들이 비옥한 초승달지대를 방황했던 초기 시절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히브리인들은 이집트에서 오랜 예속 생활을 겪었고, 이후 모세가 그들을 이끌고 시나이 사막을 가로질러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그들은 가나안 원주민 대부분을 정복했는데, 가장 유명한 전설 중 하나에 따르면 나팔 소리와 함께 여리고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고 전해집니다.
히브리인들은 '사사'라고 불리는 지도자들의 지휘 아래 부족 사회를 이루며 살았습니다. 가자 인근 남부 해안 평야에 살던 전사 민족 필리스티아인의 저항에 직면하자, 정복자들은 단일 왕 사울(기원전 1020~1006년경) 아래 통합하기로 결심합니다. 그의 후계자 다윗(기원전 1006~965년경)은 필리스티아인을 격파하고 이웃 국가인 모압과 에돔을 이스라엘의 지배 아래 두었습니다. 마지막까지 버티던 가나안의 요새 예루살렘이 함락되면서 다윗 왕국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성경 기록의 정확성을 검증하는 것은 어렵지만, 고고학 발굴 결과들은 가나안 정복과 사울 왕국 건립이라는 서사를 뒷받침합니다. 다윗의 군사적 성공은 당시 자체적인 혼란에 시달리던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가 저항할 여력이 없었 던 점에 일부 힘입은 것으로 보입니다.
다윗은 왕위를 아들 솔로몬(기원전 965~928년)에게 물려주었습니다. '평화의 왕'으로 불린 솔로몬의 통치기에는 대규모 건축 사업이 진행되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이 성전은 시나이 산에서 야훼가 모세에게 전한 율법판을 담은 언약궤를 안치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막대한 공사비용은 솔로몬이 백성들 사이에서 점차 인기를 잃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실제로 많은 백성들이 조선소에 강제 징발되었고, 그는 북방 페니키아 도시 티레에 장인과 건축 자재를 받는 대가로 땅을 넘겼다는 비난도 받았습니다. 게다가 야훼 이외의 다른 신들을 섬겼다는 의혹까지 제기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왕국의 분열과 내분
솔로몬이 죽자 북부 이스라엘의 부족들은 후계자에게 자신들의 처우 개선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요아브 왕의 거부에 직면하자 반란이 일어났고, 결국 국가는 둘로 갈라졌습니다. 북쪽에는 이스라엘 왕국이, 남쪽 부족들은 유다 왕국을 세워 각자 자체 군주의 통치를 받게 된 것입니다. 히브리 민족의 이러한 분열은 최악의 시기에 닥쳤습니다. 파라오 시샤크의 통치 아래 이집트는 재건되어 부흥하고 있었습니다.
기원전 924년, 이집트군이 유다와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행군 도중 수많은 도시를 파괴하고 히브리인들에게 공물을 바치게 했습니다. 이 정복은 양 왕국 간의 갈등을 달래기는커녕 오히려 부추겼고, 이는 속국이었던 모압과 에돔이 자율성을 회복할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종교 분쟁도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이스라엘 왕 아합(기원전 873~852년)은 페니키아의 신 바알 숭배를 들여왔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같은 종교 지도자, 즉 선지자들은 백성들에게 이단과 내분의 위험을 경계하라고 촉구했습니다.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지배
기원전 9~8세기 당시 지역을 지배하던 아시리아 제국은 히브리 왕국들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곧 아시리아의 속박 아래 놓였고, 곳곳에서 벌어진 몇 차례의 반란은 잔혹하게 진압되어 수천 명의 포로들이 아시리아로 강제 이주당했습니다. 기원전 612년 아시리아가 멸망하면서 그 자리는 신바빌로니아 제국이 대신했습니다. 기원전 597년, 느부갓네살 2세는 유다의 반란을 피로 젖은 진압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약탈당했고, 솔로몬 성전은 파괴되었으며, 보물들은 약탈되었습니다.
수천 명의 유대인 — 이제 히브리인은 유대인으로 불리게 됩니다 — 이 바빌론으로 강제 이송되었습니다. 유배 생활 동안 유대인들은 민족 정체성의 수호자인 종교에서 위로와 지지를 얻었습니다. 성경 구약성서를 이루는 대부분의 책들이 최종적인 형태로 완성된 것도 바로 이 시기였습니다.
유대인의 디아스포라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 왕 키루스가 바빌론을 점령하면서 유대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허가를 받았지만, 많은 이들이 그대로 머무르기를 선택했습니다. 페르시아 세력권에 편입된 유대 왕국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과 함께 그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헬레니즘 관습에 억눌린 유대인들은 봉기하여 기원전 142년 독립 유다 왕국을 세웠으나 그 존재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기원전 63년, 유다는 로마 제국에 병합되었습니다. 유다의 마지막 왕인 헤로데 대왕은 로마의 속국으로서 논란 많은 통치 기간 동안 과거 왕국의 환상을 간직하게 했습니다.
그 무렵 유대 사회에는 여러 분파가 존재했습니다. 그중 한 지도자의 가르침 — 예수(기원전 6년 ~ 기원후 30년)의 가르침은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의 탄생으로 이어졌습니다. 열심당(Zealots)과 같은 다른 유대 분파들은 폭력적인 봉기를 일으켜 로마의 지배에 맞섰지만 피로 물든 진압을 당했습니다. 기원후 73년, 마사다 요새의 함락은 열심당의 저항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이 봉기 이후 로마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고 그 보물들을 로마 거리를 행진하며 자랑스럽게 내보였습니다.
패전 때마다 새로운 유대인들이 고향을 떠나 망명의 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4세기 초부터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근동이나 지중해 연안으로 떠나 상업의 요충지와 항구 도시에 정착했습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이 전 세계로 흩어진 현상을 '디아스포라'라고 부릅니다. 이는 근대까지 이어졌고, 정착지에서 유대인들은 박해의 대상이 되었는데, 특히 그리스도를 죽였다는 누명을 씌운 기독교인들로부터 박해를 받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유대인들은 고향 없이 떠돌다가 1948년 이스라엘 국가가 수립되면서 비로소 자신의 나라를 되찾게 됩니다.
참고 문헌
- 『성경이 말하지 않는 이스라엘사』, 이스라엘 핀켈슈타인 저, Odile Jacob 출판사, 2013.
- 『이스라엘의 간략한 성경사』, 브라이언 티디먼 저, 성서연구원,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