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은 결국 일본의 항복(1945년 9월 2일)으로 이어졌습니다. 도쿄만에 정박한 미국 전함 미주리호에서 정식 항복 문서가 조인되었고, 이로써 제2차 세계 대전의 종결이 선포되었습니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기습으로 시작된 태평양 전쟁은 수십만 명의 병력이 지상과 공중에서 격돌한, 세계 최대 규모의 작전 무대였습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일본은 약 200만 명에 달하는 사망자를 냈으며, 도시의 거의 40%와 국가의 모든 경제 구조가 파괴된 상태였습니다.
'평화당'의 시도
1942년의 연이은 패배로 이미 신뢰를 잃기 시작했던 전쟁당의 입지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핵공격으로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1944년 말부터 일본 열도에 대한 대규모 폭격은 멈추지 않았지만, 원자폭탄이라는 공포는 너무나 예상 밖의 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1945년 8월 15일, 일본 라디오는 통치 20년 만에 처음으로 천황이 직접 방송에 나선다고 발표했습니다.
천황의 개입은 공식적인 항복을 알리는 것이었고, 그 이유는 새로운 미국 무기에 대한 공황 앞에서 평화를 염원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핵무기가 있든 없든, 결과적으로 패배는 불가피해 보였습니다. 1941년 말과 1942년 초의 승전 감정은 천황의 최측근 고문인 키도 후작을 비롯한 일부 권력 집단 안에서 빠르게 의심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키도는 1942년과 1943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고노에 공작의 지지를 얻는 데 성공합니다. 1944년은 결정적인 해로 여겨집니다. 키도는 소련과의 관계를 좁히려는 계획을 세웠고, 이는 외무대신 마모루의 직접적인 지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평화당'이 제국 강경파에 의해 여론이 주도된 국민의 지지를 얻기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미국의 폭격이 마지막 단계로 강화되었음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같은 해 10월, 도조 총리는 권력을 내려놓아야 했고, 그와 함께 '전쟁당'의 상당 부분도 물러나게 됩니다. 제국 해군은 더 이상 공세 작전을 수행할 수 없음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11월 7일, 스탈린이 일본을 소련에 대한 침략국으로 규정하면서 소련의 위협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패배라는 생각을 받아들이기 어려움
1944년 말과 1945년 초는 일본에게 대패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실질적인 신호였습니다. 일본 제국은 필리핀, 마리아나 제도, 오키나와를 차례로 상실했습니다.
그럼에도 평화당은 여전히 은밀하게 활동해야 했습니다. 키도와 고노에는 상황을 우려하기 시작한 천황을 알현하지만, 신중을 기해야 했습니다. 도조가 물러난 뒤에도 군부는 언제나 위협적인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평화당은 신속한 강화를 선호하던 존경받는 스즈키 제독에게 권력을 넘깁니다. 그러나 새 정부 수반 역시 우유부단하게 시간을 흘려보냈고, 1945년 4월까지 평화당은 거듭된 시도에도 거의 진전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적에게 항복한다는 결정 자체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당시 외교관들은 군인들, 나아가 국민들 못지않게 1930년대 제국 일본의 성공 이후 패배라는 현실을 전혀 간파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시절 일본의 사고방식은 패배를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곧, '포츠담'이라는 이름의 결정타가 그들 앞에 놓이게 됩니다.
독일의 패배는 현실이 되었고, 일본의 '평화당'에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신임 외무대신 도고는 1945년 5월 소련에 접근하려 했으나, 소련 측은 한층 더 소극적이었습니다. 결국 실패였고, 이번에는 군부가 "끝까지 전쟁을 계속하자"고 부추기며 분위기를 주도했습니다. 평화 지지자들에게 희망을 되찾아 주려면, 최고전쟁지도회의를 소집하는 천황의 개입이 필요했습니다. 매우 엄선된 조건 아래 천황은 소련과의 화해의 길을 다시 열었습니다. 때는 이미 1945년 7월! 스탈린은 포츠담 회담에 참석한 상태였고(그는 연합국에 일본의 접촉 시도를 알릴 처지에 있었습니다), 폭탄은 뉴멕시코에서 실험을 마친 참이었습니다. 1945년 7월 말의 포츠담 선언은 일본의 '평화당'에 통렬한 좌절을 안겼습니다. 선언은 천황과 황위의 장래에 대해 아무런 언급 없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군부에게 이것은 연합군이 정권의 종언과 일본 제국의 해체, 국가 점령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는 증거였고,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습니다. 천황 자신에게도 이는 감수하기 어려운 내용이었고, 이로써 '평화파'는 마지막 비장의 카드마저 잃고 말았습니다.
핵공격에 내몰린 일본
그 모든 상황 속에서도 막대한 손실과 다가오는 침략의 위협 앞에서, 아나미 육상대신이 이끄는 전쟁당조차 기세가 꺾이며 야망을 수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나미는 포츠담 선언의 재협상에 응할 의향을 보입니다. 불행하게도 너무 늦은 시점이었습니다. 일본은 우유부단함과 황위 소멸에 대한 두려움 속에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해 버렸습니다. 미국 역시 소련의 야망에 대한 부담 속에서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고, 3일 뒤에는 나가사키에 투하했습니다. 얄타 협정에 따라 소련은 8월 8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다음 날 만주를 침공했습니다.
도쿄는 공황 상태에 빠졌습니다. 수도 자체에 대한 핵위협에도 불구하고, 목표는 이윽고 황위를 지키는 것 하나로 좁혀져 갔습니다. 일본 지도부가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현실을 받아들여 항복의 의무를 인정하기까지 몇 시간이 걸렸습니다. 포츠담 선언의 조항은 마침내 도고 외무대신에 의해 수용되었지만, 군부는 점령을 피할 것을 고집했습니다. 이에 스즈키 총리는 천황께 도고안과 군부안 중 하나를 선택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1945년 9월 2일: 일본의 항복
1945년 8월 10일, 일본은 항복 의사를 밝혔지만 세부 사항을 확정하는 데 며칠이 더 걸렸습니다. 핵심 쟁점은 바로 천황의 처우였습니다. 미국 국무장관 번스는 천황이 "연합국 최고사령관의 지휘에 복속될 것"이라고 밝혔고, 이는 일본 군부 사이에 새로운 분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이후 며칠간 논의가 이어졌으나, 결국 천황은 평화파를 선택했고 내각은 만장일치로 그 결정을 승인했습니다. 8월 15일 천황의 담화는 일본의 항복을 선포했으며, 정권의 불안정을 틈타 움직이려는 모든 종파의 극단주의자들을 초기에 억누르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음모의 시도 자체를 막지는 못했고, 8월 14일 밤의 쿠데타 기도는 다행히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육상대신 아나미는 자결했고, '전쟁당'의 다른 지도자들도 뒤를 따랐습니다.
일본군의 항복은 전함 미주리호의 갑판 위에서 공식적으로 서명되었습니다. 1945년 9월 2일, 도쿄만에서 맥아더 장군이 주재한 가운데 거행된 조인식이었습니다. 미국 점령군(1945~1950)의 최고책임자로서 맥아더는 이후 일본의 비무장화와 민주적 전환 과정에서 결정적인 정치적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참고문헌
- P. Souty, 태평양 전쟁 1937-1945, PUL, 1995.
- F. Garçon, 태평양 전쟁, Casterman, 1997.
- J. Costello, The Pacific War, 2권, Pygmalion, 1982.
- 제2차 세계 대전, Jules Tallandier 판, 7권, 196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