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덩케르크 대철수 '다이나모 작전'(1940): 제2차 세계대전의 기적으로 불린 구출 작전

덩케르크 대철수  다이나모 작전 (1940): 제2차 세계대전의 기적으로 불린 구출 작전덩케르크 철수(Dunkirk Evacuation)는 다이나모 작전(Operation Dynamo)으로도 알려진 군사 작전으로, 제2차 세계대전 초기인 1940년 5월 27일부터 6월 4일까지 진행되었습니다. 독일 기갑사단에게 포위된 영국군과 프랑스군을 덩케르크 교두보에서 잉글랜드로 철수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왕립해군은 도버에 구축함과 소해함은 물론 상선, 어선, 유람선까지 가능한 한 많은 배를 징발해 모았습니다. 덩케르크 주변 방어선을 끝까지 사수한 영국군, 특히 프랑스군 부대들의 필사적인 지원 덕분에 부두와 해변에 모인 수많은 병사들이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1940년 5월 말, 덩케르크에 갇힌 연합군

1940년 5월 26일, 구데리안 장군 휘하 독일 제19군단의 기갑사단들이 아브빌 지역과 솜 강 하구에 도달한 지 벌써 6일이 지났습니다. 1940년 독일의 서부 침공 계획, 이른바 황색 계획(Fall Gelb)의 핵심이었던 '낫 공격'은 완벽하게 성공한 것입니다.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지원하기 위해 급히 북상했던 영국 원정군(BEF, 최신식 장비로 무장한 10여 개 사단)과 프랑스군(제1군 및 제7군 잔여 병력)은 플랑드르에서 젤란트에 이르는 거대한 포위망 안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백만 명에 달하는 연합군 병사들이 국방군의 손바닥 위에 놓인 상황이 된 것입니다.

포위망 축소가 임박한 가운데 파리와 런던의 입장은 크게 엇갈렸습니다. 프랑스군 총사령관 베이강(Weygand) 장군은 여전히 남쪽 독일군 전선, 특히 아브빌 방면에 대한 역공으로 포위망을 돌파하려는 계획을 고수했습니다. 반면 영국 참모본부와 BEF 사령관 고트(Gort) 장군은 이 기동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 깊은 회의를 품고 있었습니다. 유일한 정규군을 통째로 잃을 위기에 처한 영국 정부는 결국 해상 철수를 선택했고, 이것이 바로 다이나모 작전입니다.

왜 '다이나모'라는 이름인가?

작전명 '다이나모'는 램지(Ramsay) 부제독이 도버 성 지하의 발전기실(dynamo room)을 작전 지휘부로 삼아 계획을 세운 데서 유래했습니다. 5월 28일 벨기에군의 항복으로 시간이 더욱 촉박해진 가운데, 램지 부제독의 지휘 아래 덩케르크 항구 주변에 방어적 후퇴선이 구축되었습니다. 독일군의 진격을 늦추기 위해 수많은 프랑스 부대들, 특히 릴에 고립된 제1군 잔여 병력이 희생을 자처했으며, 역공 과정에서는 독일 제251보병사단을 지휘하던 장군을 포로로 잡는 성과까지 거두었습니다.

한편 덩케르크 항구 주변에 방어선이 형성되고 연합군 부대들이 장비를 파괴하거나 버려두는 동안(이 장비들은 곧 독일군의 전리품이 되었습니다), 영국은 전례 없는 규모의 수송 선단을 동원했습니다. 왕립해군이 투입한 39척의 구축함과 수많은 소형 함정의 호위 아래, 요트에서 트롤어선, 바지선에 이르기까지 수백 척의 잡다한 선박이 모였습니다. 철수 작업은 루프트바페의 끊임없는 공습 속에서 이루어졌으며, 잉글랜드 남부에 주둔한 영국 전투기 부대의 조종사들이 필사적으로 맞서 싸웠습니다. 바로 덩케르크의 하늘에서 유명한 스핏파이어가 그 전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9일간의 기적, 34만 명의 철수

덩케르크 대철수  다이나모 작전 (1940): 제2차 세계대전의 기적으로 불린 구출 작전프랑스 해군의 지원을 받은 왕립해군은 혹독한 조건 속에서도 단 9일 만에 약 34만 명의 전투원(그중 3분의 1은 프랑스군)을 철수시키는 경이로운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육지에 남겨진 부대들은 독일군을 상대로 희생 임무를 끝까지 수행했습니다. 6월 4일 다이나모 작전이 종료될 때, 덩케르크 포위망에 남았던 3만 5천 명의 프랑스 병사가 포로가 되었고 1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연합군 함대 또한 작전 과정에서 약 100척의 선박을 상실했습니다.

승리가 아닌 기적, 그러나 희망의 신호

덩케르크 대철수  다이나모 작전 (1940): 제2차 세계대전의 기적으로 불린 구출 작전당시 사람들은 이를 '기적'이라 불렀습니다. 다이나모 작전은 실제로 영국 원정군을 구하는 데 성공했지만, 잉글랜드 해변에 내린 것은 장비를 모두 잃은 '알몸의 군대'였습니다. 처칠은 "전쟁은 철수로 승리하지 못한다"며 이를 승리로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다이나모 작전은 독일군에 맞선 연합군 저항의 상징이자, 어떤 일이 있어도 싸움을 계속하겠다는 런던의 의지를 보여준 선구적 신호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함께 읽기: 1940년 5~6월, 스당에서 덩케르크까지

더 읽을거리

- 모리스 바이스(Maurice Vaïsse) 편, 『외국인 역사가의 눈으로 본 1940년 5~6월: 프랑스의 패배, 독일의 승리』, Autrement, 2010.

- 도미니크 로르미에(Dominique Lormier), 『하루하루로 보는 프랑스 전투: 1940년 5~6월』, Cherche Midi, 2010.

-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 영화 『덩케르크(Dunkirk)』,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