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카타리파: 가톨릭에 맞선 중세의 또 다른 기독교 교회

카타리파: 가톨릭에 맞선 중세의 또 다른 기독교 교회중세 시대 카타리파(Cathars)는 알비파(Albigensians)라고도 불리며, 프랑스 남서부에 널리 퍼져 있던 기독교 운동이었다. 카타리즘의 탄생은 대체로 12세기 중반, 교황이 자신의 권위를 모든 세속 권력 위에 놓았던 시기로 잡을 수 있다. 자신들을 사도의 후계자로 여긴 카타리파는 독자적인 교회 모델, 즉 자체적인 성직자 위계와 성례전 체계를 세웠다. 이에 로마 교회는 이들을 이단으로 규탄하며 본격적인 탄압에 나섰다.

카타리즘의 기원

19세기 이후 '카타리'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중세의 이단자들은, 동방의 여러 종파를 거쳐 서방에 전해진 고대 마니교의 부활이 아니었다. 흔히 보고밀파(Bogomils)가 그 마지막 계승자로 소개되곤 하는데, 이는 중세 시대 카타리파의 적대자였던 가톨릭 성직자들이 퍼뜨린 견해일 뿐이다. 정작 이단자들 자신은 동방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카타리즘의 탄생은 12세기 중반경, 교황권이 거의 한 세기에 걸쳐 추진한 '그레고리 개혁' 이후의 상황 속에서, 그리고 개혁 이후 기독교 사회에 강요하려던 새로운 질서에 대한 반발로 이해할 수 있다.

개혁 과정에서 황제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교황은 새로운 전투적 교회의 수장이 되었고, 나아가 사회 전체의 수장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영국의 중세학자 로버트 무어(Robert Moore)가 표현한 대로 '박해의 사회'가 본격화된 것이다. 이 신정(theocracy) 질서에 반대하는 세력, 곧 '이단자'로 명명될 이들을 근절하려 한 새 질서의 건설자들은, 이단 투쟁의 최전선에 있던 시토회와 프레몽트레회 수도사들을 통해 박해를 실행했다.

이들은 중세 서방의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플랑드르, 라인란트, 부르고뉴에서는 '직공', '카타리', '부거' 등으로, 이탈리아에서는 '파타린(Patarins)'으로, 프랑스 남부에서는 '알비파'로 불렸다. 그러나 이들 스스로는 프랑스 남부에서 '선한 남자와 선한 여자(bonshommes)', 이탈리아에서는 단순히 '기독교인'이라 칭했다.

카타리파가 지적한 가톨릭 교회의 폐단

카타리파가 가톨릭 교회에 대해 제기한 비판의 뿌리는 10세기부터 12세기 사이 기독교 서방을 뒤흔든 사회·정치·경제·종교적 변혁 속에서 찾을 수 있으며, 일부는 카롤링거 시대(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전 세기에 '이단'으로 규탄되었던 집단들과 마찬가지로, 카타리파는 로마 교회의 물질적 부패와 성직자들의 타락한 도덕성을 강하게 비판했다.

카타리파: 가톨릭에 맞선 중세의 또 다른 기독교 교회특히 그들은 교황 실베스터 1세(재위 314~335년)를 '적그리스도'로 간주하며, 이 시점부터 이어진 가톨릭 계보의 타락이 그 주교들이 집행하는 성사를 무효로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이유로 14세기 초 종교재판소의 화형대에서 마지막 신도들이 사라질 때까지, 카타리파는 자신들을 사도의 진정한 후계자로 여기며 초기 기독교 시대의 교회로부터 계보를 이어왔다. 결국 도덕적 이유가 이들의 비판과 항의의 출발점이었고, 그들은 사도 시대의 교회 모델로의 회귀를 제안했다.

그러나 카타리파 역시 전형적으로 중세적인 기독교 교회였다. 그리스어 '카타로스(katharos)', 즉 '순수한'에서 이름을 딴 이들은 라인란트든 프랑스 남부든, 초기 중세를 지배하던 수도원적 영성을 깊이 흡수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현세와 세속 권력, 육체의 욕망을 악마적 본성의 것으로 간주하며 극도로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이전 세기의 수도사들처럼, 이들의 세계관은 신약성서의 특정 구절, 특히 요한복음, 요한계시록, 바울 서신에 대한 해석에 뿌리내리고 있었으며, 랑그독 출신의 익명 이단 저술가가 이를 모아 '익명 논문'으로 남겼다.

가톨릭 성사에 대한 반대

이 논문에서 저자는 선한 세계와 악한 세계, 두 세계의 존재를 주장한다. 세계의 이원성에 대한 믿음을 한층 급진화하면서, 그는 하느님이 천상의 세계, 즉 영원한 창조의 근원이며, 악마—성서에서 '이 세상의 신' 혹은 '이 세상의 군주'라 불리는 외래의 신—가 눈에 보이는 세계, 곧 허무의 근원이라고 단언했다.

카타리파에게 악마(루시퍼, 빛의 천사)는 원죄의 장본인이다. 아버지인 하느님과 자신을 겨우려 들다 교만의 죄를 지었고, 아버지에게 쫓겨난 뒤 세상과 육체, 즉 창세기 3장 21절이 말하는 '가죽 옷'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13세기 초, 특히 이탈리아의 일부 카타리 교회들은 악의 기원, 죄, 자유의지, 신의 전능, 하느님의 아들의 성육신 같은 핵심 신학 문제를 두고 분열했고, 때로는 서로 충돌하기도 했다.

선과 악의 원리

바로 그 무렵, 이탈리아 카타리 교회 중 하나인 가르다 호 인근 데센차노(Desenzano) 교회가 상반되는 두 원리, 즉 선의 원리와 악의 원리에 대한 믿음을 체계화했다. 각각의 원리는 선하고 보이지 않는 창조와, 악하고 부패할 수 있는 창조를 각각 관장한다는 것이었다. 이 '두 원리'에 관한 신학 논문은 이 교회의 지도자 중 한 명인 장 드 뤼지오(Jean de Lugio)가 1230~1240년경 집필한 것으로 전해진다.

가톨릭 신학자들은 늘 카타리파를 이원론자로 몰아왔지만, 이 믿음은 이단자들 사이에서도 독창적이지 않았고 다수파의 신념도 아니었다. 오크 지방에는 비교적 늦게 전해졌으며, 이는 이 중세 이단자들이 참여한 기독교 사유의 합리화 과정에서 나온 결과물 중 하나였다.

그들에게 가톨릭 교회는 '악마의 교회'였고, 그 교리는 '악마들의 가르침'이었다. 초기 기독교 교회의 조직에서 영감을 받아, 카타리파의 '선한 사람들'은 사도들처럼 안수를 통한 그리스도의 세례를 집행했으며, 이를 옥시탄어로 '콘솔라시옹(consolation, 위로)'이라 불렀다.

다만 사도 시대의 세례와 달리, 카타리의 영적 세례는 종교에 입문하는 의식이었다. 이 세례를 받으면 단순한 신자가 카타리 성직자, 곧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세례를 받기 전 예비 성직자는 신입 수련 기간을 거쳐야 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지켜야 할 도덕 계율을 배웠다. 살인하지 않기, 간음하지 않기, 거짓말하지 않기, 도둑질하지 않기, 맹세하지 않기, 고기·달걀·유제품을 먹지 않기, 주간 및 연간 금식 실시, 그리고 기도 의무 등이 그것이었다. 일반 신자 역시 생전에 교회 위계에 미리 청원해 두었다면(서약, 콘베니엔티아) 임종 시 영적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카타리 교회의 조직

카타리파: 가톨릭에 맞선 중세의 또 다른 기독교 교회카타리 교회의 위계는 '선한 사람들', 즉 수도 성직자 가운데서 선출되었다. 위계는 주교, 부제, 장로(남성 공동체) 또는 수도원장(여성 공동체)의 세 범주로 구성되었다. 각 교회는 주교가 이끌었으며, 주교는 다른 교회로부터 자율적·독립적으로 교구를 운영했다. 선한 사람들은 그 어떤 상위 권위도 인정하지 않았다.

부제들은 자신의 교구 내 선한 남자와 선한 여자 공동체를 담당했으며, 매월 열리는 고해 의식인 '아파레야망(aparelhament)'을 집행할 책임이 있었다. 공동체의 '집(domus haereticorum)'은 십자군 이전 시대 지역 공동체의 기본 단위를 이루었다.

12세기 말, 선한 사람들의 운동은 알비, 툴루즈, 카르카손의 세 주교구를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1226년에 이르러서야 카르카손과 툴루즈 교회의 지도자들이 리무 근처 피외스(Pieusse)에서 라제스(Razès) 교회를 신설했고, 1229년 또는 1232년경에는 툴루즈 교회의 지도자들이 아쟁(Agen) 교회를 세웠다. 이 두 개의 새 교구는 아마도 알비 십자군(1209~1229)이 공동체 내부에 가져온 균열의 산물이었을 것이다.

1208년 교황청이 프랑스 남부 제후들에게 선포한 이 전쟁의 시작은, 당대의 하나의 기독교 교회였던 카타리즘에 종을 울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참고문헌

- 『카타리의 역사』, 미셸 로크베르(Michel Roquebert) 지음. Tempus, 2002.

- 『카타리 종교』, 미셸 로크베르(Michel Roquebert) 지음. Tempus, 2009.

- 『카타리즘: 중세 기독교의 이단 모델(12~13세기)』. PURE, 2009.

- 『카타리 비극의 이해』, 클로드 르베델(Claude Lebédel) 지음. Ouest-France,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