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메르 루즈(Khmer Rouge)는 일반적으로 1975년, 론 놀(Lon Nol) 독재가 이끌던 캄보디아 공화국이 무너진 뒤 정권을 장악한 캄보디아 공산당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지도자 폴 포트(Pol Pot)는 모든 반대 세력을 체계적으로 숙청하며 불과 몇 달 만에 전체주의 국가를 건설했습니다. 그는 미군의 도시 폭격을 구실로 삼아 도시 주민을 더 철저히 통제하기 위해 대대적인 추방 작전을 조직했고, 크메르 루즈는 캄보디아를 고립시켜 거대한 강제 노동 수용소로 변모시켰습니다. 이들의 만행으로 약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크메르 루즈의 탄생과 성장
'앙카르 로우(Angkar Loeu)'라고도 불리는 최고 조직, 즉 캄보디아 공산당은 1950년대에 창설되었으나 오랫동안 실질적 영향력이 없는 소수 정당에 머물러 있었습니다(1955년 총선 득표율은 고작 4%). 1958년 활동이 금지되면서 지하로 숨어들었고, 1961년경 '폴 포트'라는 가명으로 더 잘 알려진 살로스 사(Saloth Sar)가 당을 재조직했습니다. 시아누크(Norodom Sihanouk) 왕자가 이들을 '크메르 루즈'라 명명했으며, 1962년에는 권력 장악을 시도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이 실패는 1966년 바탐방(Battambang)주 삼라우트(Samlaut) 지역의 농민 봉기로 이어졌고, 당시 총리였던 론 놀 장군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되었습니다. 이후 합법적 좌파 지도자였던 키우 삼판(Khieu Samphan), 후 유온(Hou Yuon), 후 님(Hu Nim)이 공산당에 합류했습니다. 당원 수는 1,000명을 넘지 않았지만, 이들은 베트남 전쟁이 만든 정세를 교묘히 활용하는 조직이었습니다. 1968년 1월, 공산당은 카다몬 산맥에서 무장 투쟁을 시작했으나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1970년 론 놀의 친미 쿠데타로 노로돔 시아누크 왕자는 캄푸치아 민족통일전선(FUNK)을 결성했습니다. 하노이는 즉각 그를 지지하며 크메르 루즈가 FUNK 진영에 합류하도록 도왔습니다. 1970년 3월 23일 베이징에서 시작된 시아누크 왕자의 저항 호소는 농민들을 FUNK 진영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무장 병력이 3,000명에 불과하던 크메르 루즈는 대규모 모집에 나서 시골 지역을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1970년 4월 미국의 개입도 상황을 바꾸지 못했고, 결국 1975년 4월 17일 수개월간 포위되어 있던 프놈펜이 함락되었습니다.
폴 포트의 피비린내 나는 독재
'창조적인 마오이즘'을 내세운 크메르 루즈는 자급자족과 공동체 군사화 원칙에 기초한 사회·경제 체제를 구축했습니다. 농민과 당원만 참여하는 선거는 대체로 조작되었으며, 실질적 권력은 폴 포트가 이끄는 혁명 평의회, 곧 '앙카르(Angkar, 캄보디아 조직)'에 완전히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앙카르는 자유직업인, 학자, 군인 등 국가의 모든 지식 엘리트를 처형하라고 명령하는 한편, 광신적인 방식으로 농업 생산을 집단화하며 본색을 빠르게 드러냈습니다. 농민 공산주의를 대표하던 크메르 루즈는 도시를 비우고 캄보디아를 농촌화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 공동체에 전적으로 헌신시킨다는 명목 아래 산업 시설과 도시, 기반 시설은 약탈당했습니다. 화폐는 폐지되었고, 가족은 강제로 흩어졌으며, 개인은 농업 협동조합에서 혹독한 노동을 강요당했습니다.
이 전체주의 테러 정책의 결과는 참으로 참혹했습니다. 대규모 추방으로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은 데 이어, 강제 노동·영양실조·탄압으로 100만~300만 명이 사망했습니다. 도시 주민과 엘리트에 대한 집단 학살 정책은 베트남의 개입 이후에야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크메르 루즈는 캄보디아 내 소수 베트남계 주민들과의 전쟁을 벌이며 스스로 몰락의 길을 걸었고, 이는 1978년 12월 베트남군의 캄보디아 침공으로 이어졌습니다. 베트남은 무력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심했고, 3주간의 군사 작전 끝에 크메르 루즈를 태국 국경의 카다몬 산맥과 당렉(Dangrek) 산맥 게릴라 지역으로 몰아냈습니다.
크메르 루즈의 몰락과 재판
1979년 1월 축출된 폴 포트와 그의 동료들은 그럼에도 1990년대 말까지 절박한 게릴라전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1997년 7월 훈센(Hun Sen) 쿠데타 다음 날부터 크메르 루즈는 정부군의 압박을 받았고, 노로돔 시아누크 지지 세력과의 공동 전선을 재건할 여력도 없어 탈영자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1998년 4월 폴 포트가 사망하자 그들은 안롱벵(Anlong Veng) 국경 지역에 대한 병력과 통제권 대부분을 상실하며 전례 없는 좌절을 겪었고, 캄보디아 정치에서 다시 중요한 역할을 하겠다는 희망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비극이 일어난 지 약 30년 뒤, 캄보디아 판사와 국제 판사로 구성된 특별재판소가 프놈펜에서 개소하여 1975년부터 1979년 사이 크메르 루즈 정권 하에서 200만 명이 사망한 사건의 주요 가해자(생존자)들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집단학살죄, 전쟁범죄, 인도에 반한 죄로 기소된 인물은 ▲S-21 보안센터 전 소장 강켁(Kang Kek, 별명 '두치') ▲전 육군 정치위원 누온 체아(Nuon Chea) ▲전 국가원수 키우 삼판(Khieu Samphan) ▲전 외교수석 옌 사리(Ieng Sary)와 그의 아내이자 전 장관 옌 티리트(Ieng Thirith) 등입니다.
참고문헌
- 프랑시스 데롱(Francis Deron), 『크메르 루즈 재판: 캄보디아 대량학살에 관한 30년의 조사』, 갈리마르(Gallimard), 2009.
- 카미유 스칼라브리노(Camille Scalabrino), 『캄보디아: 역사와 현안 1945-1985』, 아르마탕(Harmattan),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