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뫼즈-아르곤 1918: 일련의 무질서한 행위

1918년 9월 말, 미국원정군(A.E.F.)의 진격은 혼란에 빠졌다. 후방 도로는 완전히 막혀 있었고, 전선으로 이어지는 단 세 개뿐인 접근로는 모두 독일군의 포화에 노출되어 있었다.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연합군 부대는 포병의 지원마저 받지 못했다. 포병 부대가 앞으로 전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제120야전포병연대의 칼 페너(Carl Penner) 대령은 자신의 75mm 야포들을 전선까지 끌고 가는 데 실패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너무 많은 부대를 그토록 좁은 공간에 몰아넣으려 한 것 자체가 큰 잘못이었다고 한다.

인플루엔자와 혹한, 그리고 증원되는 독일군

크림힐데 방선(Kriemhilde-Stellung)을 향해 진격하는 동안 미군은 인플루엔자 유행으로 2만 명이 넘는 병력을 추가로 잃었다. 전투 시작 후 첫 2주 동안 날씨가 특히 춥고 습했기 때문이다. 같은 기간 독일군은 완편된 9개 사단과 3개 사단의 일부 병력을 성공적으로 결집시켜 방어선을 보강하고 있었다.

크림힐데 방선 공격

퍼싱(Pershing) 장군은 크림힐데 방선에 대한 공격을 10월 4일 오전 5시 25분으로 확정했다. 목표는 에르(Aire) 강 유역을 내려다보는 급경사지를 제압하는 것이었다. 훗날 뛰어난 전술 감각을 보여주리라 여겨지던 리게트(Liggett) 장군조차 근위 프로이센 제1사단과 제5사단을 상대로 손쓸 수 없었다. 기관총, 철조망, 독가스, 포탄이 미군 부대들을 갈아엎었으며, 특히 용맹하기로 이름난 제1사단이 큰 피해를 입었다.

10월 4일 오후 1시, 제16연대 제3대대에는 초기 병력인 장교 20명과 병사 800명 중 겨우 장교 2명과 병사 240명만 남아 있었다.

제28보병연대의 모리 매버릭(Maury Maverick) 중위는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는 붉고 노란 줄무늬가 그어진 거대한 검은 공간 속에 놓여 있었다. 하늘에서는 거인들이 포효하고, 찢어발기며, 회전하다가 다시 포효했다."

그날 부상을 입은 매버릭은 포탄 폭발의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다. "거대하고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먼저 들린다. 이어서 당신을 산산조각 낼 듯한 굉음이 울려 퍼진다. 그 강도는 심장과 뇌까지 파고들어 온몸의 신경을 조각내 버린다."

'잃어버린 대대'의 6일

리게트의 공격이 진행되던 10월 2일, 제77사단 제308보병연대 소속 한 개 대대가 샤를보 물레방앗간(Moulin de Charlevaux) 인근에서 포위당했다. 사단이 연락을 재개하지 못하면서 이 대대는 식량과 탄약 없이 완전히 고립되었고, 독일군의 반복적인 공격에 시달렸다. 상황이 너무나 절박했기에 이들은 '잃어버린 대대(the Lost Battalion)'라는 이름으로만 불렸다.

그러나 지휘관 찰스 위틀시(Charles Whittlesey) 소령은 독일군의 거듭된 항복 권유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무려 6일간 버텨냈다. 마침내 사단이 포위망을 돌파해 대대 생존자들이 필사적으로 지켜온 진지에 도달했을 때, 남아 있던 병력은 600명 중 겨우 194명이었다.

한편 독일인과 결혼해 베를린에 살던 영국 출신의 블뤼허 공작부인(Princess Blücher)은 "독일이 미국에서 오는 위험을 언제나 기묘하게 과소평가해 온 방식"에 대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쿠넬 고지의 희생

불라드(Bullard) 장군이 지휘하는 쿠넬(Cunel) 고지 공격 역시 매우 더디게 진행되었고 막대한 사상자를 낳았다. 제3사단 병력 1,366명이 이 전투에서만 목숨을 잃었다.

프레데릭 T. 에드워즈(Frederic T. Edwards) 중위는 10월 5일 아침을 이렇게 묘사했다. "아직 9시도 되지 않았다. 밤새 짙은 안개가 깔렸고, 해가 그 안개를 뚫으려 애쓰고 있다. 주변 숲은 푸른빛 안개에 덮여 있다. 우리는 손끝을 계속 비벼 따뜻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는 그날 늦게 77mm 포탄 파열에 의해 전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