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3년 7월 8일, 매튜 페리(Matthew Perry) 제독이 지휘하는 미국 함대가 에도만(현재의 도쿄 앞바다)에 모습을 드러내며 일본에 국제 무역 개방을 공식 요청했습니다. 동아시아 한구석에서 홀로 고립을 지켜 온 일본은 이날 장대한 역사의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일본인들이 '검은 배(黑船)'라 불렀던 증기함 4척으로 구성된 이 함대는 200년이 넘는 쇄국 시대에 종말을 고할 것이었고, 외세의 간섭으로부터 나라를 지켜 온 쇼군은 이제 부흥하는 제국주의 열강과 산업 강국 앞에서 굴복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됩니다.
사코쿠, 200년간 이어진 일본의 고립
19세기 중반 일본은 17세기 초 이후 정치 구조가 거의 변하지 않은 나라였습니다. 명목상으로는 신성한 권위를 지닌 천황이 군주였지만, 실질적인 행정권 대부분은 쇼군이 이끄는 막부(무가 정권)의 손에 있었습니다.
도쿠가와 막부는 센고쿠 시대라 불린 15~16세기의 대규모 봉건·씨족 전쟁을 거치며 통일을 이룬 과정의 산물로, 열도 내부의 평화를 보장하는 힘으로 오랫동안 유지되었습니다. 무사 계급(사무라이)과 대봉건 영주(다이묘)를 성공적으로 길들인 뒤, 에도(훗날의 도쿄)에 자리 잡은 쇼군은 근대성을 예고하는 문화적·상업적 발전을 주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도쿠가와 막부는 외세의 영향을 깊이 경계하여 엄격한 국제적 고립, 이른바 '사코쿠(鎖國)'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그 결과 데시마의 네덜란드 상관과 간헐적인 중국·한국과의 교류를 제외하면, 일본은 엄격한 신유교 질서 속에서 스스로 문을 닫은 삶을 살았습니다. 이는 단순히 외국 상인으로부터 경제를 보호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서구 세력의 선봉으로 여겨졌던 기독교 선교사(기독교는 1612년 금지됨)로부터 국가를 지키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보수적 쇄국 정책은 결국 상당한 기술적 낙후를 초래했습니다. 19세기에 강대했지만 쇠퇴 일로에 있던 청나라에 서구 열강이 자기들의 뜻을 강요하는 광경을 일본의 통치자들은 고통스러운 눈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서구 열강은 일본이 고립을 깨도록 여러 차례 압박을 가했습니다. 미국 포경선의 출몰, 러시아의 사할린·쿠릴열도 진출, 영국의 압박까지 — 도쿠가와 쇼군에게는 걱정거리가 적지 않았습니다.
쇼군을 굴복시킨 페리 제독
결국 일본은 미국 해군 장교 앞에서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증기 해군의 개척자인 매튜 페리 제독은 1852년 노퍽항을 출항해, 일본 당국에 국제 무역 개방을 촉구하는 필모어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가 이끈 증기함 미시시피호, 플리머스호, 사라토가호, 사스케하나호는 1853년 7월 8일 우라가 항(도쿄 인근)에 도착했습니다. 쇼군의 사절은 당시 외국인과의 무역이 허용된 유일한 항구인 나가사키로 가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이 맡긴 임무를 끝내겠다고 다짐한 페리는 이를 거부하고 무력 시위에 나섰습니다. 구식 무기로는 제독의 '검은 배'를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본군은 재빨리 깨달았고, 결국 그가 상륙해 필모어 대통령의 서한을 제출하도록 허락했습니다. 며칠 후 떠나면서 페리는 다음 방문 때에는 본격적인 협상이 반드시 시작되어야 한다고 막부 당국에 분명히 경고했습니다.
이러한 무력 과시, 이른바 함포 외교(gunboat diplomacy) 앞에서 일본 정부는 화해를 택했습니다. 그래서 1854년 3월 함대 규모를 두 배로 늘려 돌아온 페리는 중요한 상업 협약을 체결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바로 1854년 3월 31일 조인된 가나가와 협약입니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시모다와 하코다테 항을 외국 선박에 개방하고, 미국 영사의 주재를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페리 제독은 이제 되돌릴 수 없는 절차의 첫 단추를 끼운 셈입니다.
일본의 새로운 시대
이후 약 15년 동안 일본은 여러 차례의 조약을 통해 외세의 영향에 완전히 개방될 것을 강요당합니다. 그에 따른 경제적·사회적·문화적 변화는 나라 최대의 정치적 위기를 불러왔습니다. 서양(특히 기술 수준)에서 배워야만 국가의 존속을 지킬 수 있다고 확신한 활동적인 소수파와 맞서, 막부 당국은 배외적 후진성에 굴복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이러한 안목 짧은 정책은 결국 내전이라는 대가를 치르게 되고, 황태자 무쓰히토(훗날의 메이지 천황)의 깃발 아래 집결한 개혁파가 승리를 거두며 막을 내립니다. 메이지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그는 20세기 초 비서구권 산업의 선두주자로 우뚝 선 조국의 눈부신 근대화를 이끌었습니다.
일본의 아시아 등장에 관한 기사도 함께 읽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