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투는 단순히 참여한 병력의 수로만 결정되지 않는다. 그 본질은 적대 세력 간 의지의 충돌이다. "인민의 군대"를 꿈꾸는 이들이 종종 간과하는 것은 바로 지휘관이 자신의 의지를 적에게 강요하고, 설령 수적·화력적으로 열세에 처해 있더라도 적을 혼란에 빠뜨리고 압도하는 능력의 가치이다.
1706년 2월 13일 벌어진 프라우슈타트 전투(Battle of Fraustadt)(현재 폴란드 서부 프쇼프(Pszów) 인근)는 이러한 사례의 전형이다. 포병 한 문 없이 출정한 소수의 스웨덴군은 두 배에 달하는 적군, 즉 요새화된 진지와 32문의 대포로 무장한 군대를 완파했다. 그 방식은 아테네 장군 밀티아데스가 마라톤에서 구사한 것과 같은 이중 포위(double envelopment) 기동이었다.
대북방전쟁의 상황
1706년, 스웨덴과 러시아·작센-폴란드·덴마크 연합군 간의 대북방전쟁(Great Northern War)은 절정에 달해 있었다. 스웨덴군은 규모는 작았지만 당시 유럽 최강으로 인정받는 군대였다. 작센 선제후 역시 훌륭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러시아군은 아직 유럽식 군대로서 성장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작센 국왕 강왕 아우구스투스(Augustus the Strong)가 다스리는 작센-폴란드 연합 왕국은 분열 상태였다. 많은 폴란드 귀족들이 독일계 국왕의 통치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반란 세력은 스웨덴에 도움을 요청했고, 스웨덴은 이에 응했다. 1706년, 스웨덴 원수 칼 구스타프 렌스키올드(Karl Gustav Rehnskiöld)가 이끄는 소규모 부대는 오늘날 폴란드 서부에서 작전 중이었다. 보병 3,700명과 기병 5,700명, 합계 9,400명, 그리고 포병은 없었다. 이 정도 규모를 "군대"라고 부르는 것은 관대한 표현이었다.
양측의 전력 비교
반면 독일(프로이센) 출신 장군 요한 마티아스 폰 데어 슐렌부르크(Johann Matthias von der Schulenburg)는 훨씬 낙관적인 전망을 가질 수 있었다. 그의 휘하에는 보병 16,000명(러시아인 6,300명, 나머지는 작센인), 작센 기병 4,000명, 그리고 대포 32문이 있었고, 추가로 기병 8,000명의 증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적으로 우세했음에도 슐렌부르크는 스웨덴군을 자신이 선택한 지형으로 유인하기로 했다. 그곳에서 싸우게 하거나, 증원 기병이 도착하는 대로 스웨덴군을 섬멸하려는 계획이었다. 독일 장군은 후퇴하는 척했고, 충동적인 스웨덴 지휘관이 반드시 따라올 것이라 확신했다.
프라우슈타트 지역에 도달한 슐렌부르크는 강력한 진지를 점령하고 부대를 요새화했다. 보병을 서로 지원할 수 있는 두 개의 전열로 배치하고, 기병은 양 측면에 배치했다. 진지 앞쪽에는 언 호수와 늪지가 펼쳐져 있었고, 진영 양 끝은 게게르스도르프(Gegersdorf)와 레르스도르프(Rehrsdorf) 마을에 닿아 있었다.
밀티아데스식 성공 기동
스웨덴 장군은 실제로 연합군을 추격하여 2월 13일 진지 앞에 도착해 지형을 살폈다. 그리고 단 3,700명의 보병을 중앙에 배치했다. 5배나 되는 적을 상대로 전열이 아닌 세 개의 밀집대형(팔랑크스)으로 말이다. 기병은 나누어 보병 양 측면에 배치했다.
스웨덴군은 기도한 뒤 전진했다. 렌스키올드의 계획은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 장군 밀티아데스가 사용한 계획, 즉 약한 중앙과 강한 양익의 전형적인 '중앙 거부'와 이중 포위 기동의 복사판이었다.
전투의 전개
스웨덴 기병은 늪지를 통과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연합군에 유능한 지휘관이 있었다면, 스웨덴군이 늪 때문에 대형이 흐트러진 순간 공격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스웨덴 기병은 전진하여 작센 기병에게 돌격했다. 흥미롭게도 스웨덴 보병은 공격하지 않았다. 중앙에 머물며 16,000명의 적 보병을 견제했다. 적 지휘관은 수적 우위만으로 스웨덴 보병을 압도하라고 명령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한편 스웨덴 좌익 기병은 작센 왕실 근위대의 정예 기병을 상대로 차례차례 돌격을 감행했다. 결국 영웅적으로 싸웠음에도 작센 기병은 무너져 도주했다. 스웨덴 우익에서는 폰 크라소우(von Krassow) 대령의 12개 용기병 중대도 작센 기병을 격파하고, 깊숙이 진입한 뒤 슐렌부르크 휘하 러시아 병사들의 후방을 공격했다.
스웨덴 좌익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스웨덴 기병이 작센·러시아 보병에게 돌격하자 그들의 대열은 공포에 빠져 무너졌고, 통제 불능의 인파처럼 무질서하게 도주했다. 이제야 스웨덴 보병도 공격에 나섰다. 특히 스웨덴 보병은 러시아인들에게 집중 공격을 퍼부었다. 서로 특별한 증오가 있던 사이였고, 러시아군은 기병의 후방 공격까지 받고 있었다.
포위와 섬멸
결과는 러시아군의 포위와 궤멸이었다. 살아남은 작센군과 러시아군은 프라우슈타트 마을로 도주했지만, 스웨덴 기병이 더 빨랐다. 기병들은 먼저 도주로 앞을 가로막았고, 동시에 스웨덴 보병도 뒤쫓아 들이쳤다.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자 수천 명의 병사가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했다.
압도적인 결과
패자의 손실은 막대했다. 약 7,400명이 전사하고 약 8,000명이 포로로 잡혔다. 승자인 스웨덴군의 손실은 전사 400명, 부상 약 1,000명에 불과했다. 슐렌부르크는 엉덩이에 부상을 입었지만 간신히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승자의 손에 들어온 전리품은 군기 71면, 적군의 대포 32문 전부, 수천 정의 머스킷총과 검이었다. 포로 중 스웨덴군은 러시아 포로 500명을 처형했다. 흥미로운 점은, 녹색 튜닉에 붉은 안감을 입은 러시아 병사들이 전투 중 작센인으로 위장하기 위해 옷을 뒤집어 입었다는 사실이다.

'고 포(Gå På)' — 스웨덴군의 독특한 전술
당시 스웨덴 보병은 독특한 전술을 채택하고 있었다. 적에게 과감히 접근하여 일제 사격을 가한 뒤, 착검과 창을 들고 곧바로 돌진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유명한 '고 포(Gå På)' 전술이다. 기병 역시 알렉산더 대왕의 헤타이로이(Companions)처럼 쐐기 대형으로 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