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트마 간디는 영국 식민지배의 종식과 인도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인도 독립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비폭력 시위라는 독특한 저항 방식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영국 식민 통치에 맞서 인도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인도의 지도자였습니다. 간디는 특히 사티아그라하(Satyagraha)라 불리는 비폭력 저항 방법을 개발하고 실천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생은 1948년 힌두 민족주의자의 암살로 비극적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간디의 초기 생애
'마하트마(mahatma)'는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입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1869년 10월 2일 인도 서부 해안의 포르반다르에서 태어났으며, 출생 등록명은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였습니다. 아버지 카람찬드 간디는 영국 제국 통치 하에 그들이 살던 지역의 총독을 지낸 인물이었습니다.
간디가 종교를 깊이 존중하게 된 배경에는 어머니 풋리바이의 영향이 컸습니다. 어머니는 힌두교의 신 비슈누를 섬기던 독실하고 경건한 신앙인으로 유명했습니다. 간디의 전기 작가들은 그를 수줍음 많은 성격의 아이로 묘사하며, 학창 시절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고 전합니다.
13세가 되자 당시 인도 해당 지역의 전통에 따라 간디는 카스투르바라는 소녀와 결혼했습니다(결혼 당시 그녀는 14세였습니다). 결혼 후 몇 년 뒤 간디는 변호사가 되기 위해 법률 공부를 목적으로 잉글랜드 런던으로 떠났습니다.
1888년 간디는 아내와 아들을 잠시 남겨둔 채 영국으로 향했습니다. 유학 기간 동안 그는 경전을 읽으며 특히 힌두교에 대한 종교적 지식을 깊이 쌓았고, 채식주의자가 되어 런던의 채식주의 사교 모임에도 참여했습니다.
1891년 학업을 마친 간디는 인도로 돌아와 법률 분야에서 일자리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수줍음 많은 성격이 발목을 잡으면서 변호사로서의 커리어는 순조롭게 펼쳐지지 않았습니다. 1893년 간디는 남아프리카에서 일자리 제안을 받고, 가족을 다시 남겨둔 채 일하러 떠났습니다.
남아프리카에서의 활동
간디가 인도인의 권익을 위한 위대한 운동가로 성장한 결정적 계기는 남아프리카에서 겪은 차별의 경험이었습니다. 당시 인도인들은 식민 당국과 유럽계 현지 주민 모두에게 차별 대우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1893년 프리토리아행 기차 여정 중 있었던 한 사건은 간디에게 잊을 수 없는 경험이 되었습니다.
당시 간디는 백인 승객이 자신의 존재를 불쾌하게 여겼다는 이유로, 정당히 요금을 내고 앉아 있던 1등석 좌석을 떠나 달라는 요구를 받았습니다. 흑인용으로 지정된 3등석으로 옮기라는 요구를 거부하자 간디는 기차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남아프리카의 인도인에 대한 차별 법령 제정 등 이후에도 이어진 부당한 상황들은 간디로 하여금 그 지역 인도인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투쟁의 필요성을 확신하게 만들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간디는 현지 인도인 공동체의 지도자로 부상했고, 이러한 활동 과정에서 비폭력 저항 개념인 사티아그라하가 탄생했습니다.
인도 독립 투쟁 속의 간디
간디는 총 21년을 남아프리카에서 보냈으며, 인도인 권익 방어의 중심 인물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남아프리카에서의 활동 덕분에 1914년 인도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국내에서 유명한 인물이 되어 있었습니다. 다만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본격적인 인도 독립 운동은 1919년에야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인도에서 간디는 사티아그라하 원칙을 널리 알렸습니다. 이는 저항 시위와 시민 불복종을 통해 비폭력적으로 항의하자는 원칙으로, 부당함을 행하는 자가 스스로 그 해악을 깨닫고 회개하도록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인도 독립에서의 역할 덕분에 간디는 '마하트마(위대한 영혼)'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습니다.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간디는 시민 불복종 운동을 장려하여 국민이 통치자에 맞서 일어나도록 하고 인도 내 식민 통치를 약화시키고자 했습니다. 독립 운동에서의 역할로 인해 간디는 영국 당국에 의해 여러 차례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간디가 이끈 시민 불복종 운동은 두 차례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첫 번째는 인도 국민들에게 영국 상인의 옷을 사지 말고 스스로 옷을 짓도록 독려한 것입니다.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간디는 늘 손방직기를 곁에 두고 다녔습니다. 간디가 든 손방직기는 엄청난 반향을 일으켜 인도의 국가적 상징이 되었고, 현재는 인도 국기에 새겨져 있습니다.
또 하나 잘 알려진 사건은 1930년 3월의 '소금 행진'입니다. 이 행진에서 간디는 군중을 이끌고 인도 해안까지 걸어가 직접 소금을 채취했습니다. 이는 현지 당국이 인도인이 구매하는 소금에 세금을 부과했기 때문입니다.
간디의 활동은 1930년대와 1940년대 내내 힌두계 인도인과 무슬림 인도인 사이의 갈등이 커지는 가운데 계속되었습니다. 폭력 확산을 막으려는 간디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양측의 적대감은 오히려 깊어졌습니다. 1947년 8월 영국의 식민 통치는 끝났지만, 무슬림과 힌두교도 간의 대립은 결국 국가 분할로 이어졌고, 이 분할로 인도의 무슬림 지역은 파키스탄이라는 새로운 국가가 되었습니다.
인도 분할은 1948년 간디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1월 30일 간디는 힌두 민족주의자 나투람 고세의 총격을 받고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고세는 파키스탄과 인도의 분열에 대해 간디에게 책임이 있다고 여겨 그를 살해했습니다. 그는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1949년 처형되었습니다.
간디에 대한 비판
간디 사후 그의 삶에 관한 여러 연구가 진행되었고, 많은 연구에서 그의 행보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습니다. 주요 비판으로는 남아프리카인들을 열등하게 여긴 인종차별적 시각, 달리트(Dalits, 카스트 제도 최하층의 '만질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소홀함, 아내를 대하는 태도와 성차별적 견해 등이 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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