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은 1959년부터 1975년까지 친서방 진영의 남베트남(핵심 동맹국인 미국 포함)과 공산 진영의 북베트남(중국과 소련의 지원)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북베트남군이 남부로 점진적으로 침투하며 벌인 게릴라전 국면을 거친 뒤 갈등은 급격히 격화되었고, 미국의 대규모 군사 개입으로 번졌다. 군사적으로 교착 상태에 빠지고 막대한 손실을 입은 미군은 결국 1973년 철수를 강요당했으며, 이는 공산주의 북베트남 주도의 국가 통일로 이어지는 길을 열었다.
베트남 전쟁의 발발 배경
프랑스 식민지 '인도차이나'였던 베트남은 1946~1954년 프랑스와의 격렬한 독립전쟁 끝에 1954년 독립을 쟁취했다. 1954년 7월 제네바에서 체결된 평화 협정에 따라 국토는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고, 2년 안에 총선거를 실시해 통일하기로 합의되었다. 그러나 남베트남 정부가 선거 실시를 거부하면서, 남부의 비밀 조직망을 해체하지 않고 있던 하노이의 공산 정권은 1957년부터 사이공 정부를 약화시키는 방식으로 통일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디엠 정권에 대한 불만과 남부 농촌 주민들의 극심한 빈곤은 이러한 움직임에 순풍이 되었다.
디엠 정권에 반대하는 여러 세력은 1959년부터 사이공 정부에 의해 '비엣콩'(베트남 공산주의자)이라 불렸는데, 이들은 1960년 12월 20일 비밀리에 개최한 회의에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FNL)을 결성했다. 이 전선에는 비마르크스주의 성향의 진보 세력도 참여했지만, 점차 공산주의 세력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다. 1961년 2월 FNL은 남베트남 해방군을 창설했고, 북베트남의 인적·물적 지원을 바탕으로 1957년부터 이어진 게릴라 작전은 본격적인 전쟁 형태로 발전했다.
이런 상황에 직면한 케네디 행정부는 남베트남 정부에 대한 지원을 확대했다. 1961년 말까지 주남베트남 미군 '군사 고문관'은 1만 5,000명에 달했고, 1962년 2월에는 해당 지역에 미군 사령부가 설치되었다. 한편 디엠 정권에 대한 반발은 너무나 커져 있어서(1963년 5월부터는 승려들이 공개적으로 몸에 불을 지르는 극적인 저항이 잇따랐다) 케네디는 디엠을 버리고 쿠데타를 묵인했다. 1963년 11월 1일 일어난 군사 쿠데타로 남베트남의 독재자는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디엠의 몰락 이후 2년간 연이은 쿠데타가 남베트남의 혼란을 가중시켰고, 질서는 1965년 6월 티에우 장군이 국가원수로 취임하면서야 회복되었다.
미국의 점진적 확전
미국의 '확전'이라 불리게 될 과정은 1964년 8월 5일 통킹만에서 미국 구축함 2척과 북베트남 함대 사이에 벌어진 해상 충돌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대통령의 발표는 사실이 아니었거나 적어도 과장된 것이었음에도, 미국 내에서 폭탄처럼 울려 퍼졌다. 즉각 미 의회는 베트남에서의 미국 개입 강화를 승인했고, 미군은 자국 선박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북위 17도선 이북 지역에 첫 공습을 감행했다.
1965년 2월부터 미 공군은 북베트남에 대한 조직적 폭격을 시작했고, 1966년 6월에는 하노이와 하이퐁까지 공습했다. 남베트남 전투에 미 육군이 투입된 것은 1965년 3월부터였으며, 이후 미군 병력은 꾸준히 늘어나 1965년 초 2만 3,000명에서 1966년 중반 26만 7,000명, 1969년에는 54만 2,000명에 이르렀다.
남베트남군과 함께 한국, 호주, 뉴질랜드 군대도 참전했다. 그러나 막대한 물량과 기술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결정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비엣콩과 북베트남군은 공산권 국가들로부터 최신 무기를 공급받았을 뿐 아니라 오랜 게릴라전 경험까지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1968년 초, 북베트남군과 비엣콩은 미·남베트남 연합군이 장악하고 있던 남베트남 주요 도시들을 상대로 대규모 공세를 개시했다. 바로 '떠또 공세'다. 공격 부대들은 전략 요충 시설을 점령했으며, 후(Huê)에서는 한 달 가까이 버티기도 했다. 미군이 후를 탈환하는 과정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시가전이 벌어졌다. 떠또 공세는 미국인들에게 적의 힘을 뼈저리게 실감시켰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 여론을 깊이 분열시켰고, 1965년부터 시작되어 점차 커진 반전 운동을 촉발했으며, 미국의 국제적 위상에도 타격을 입혔다.
순탄치 않았던 평화 협상
협상을 통한 해법 모색에 무게를 실은 존슨 대통령은 1968년 3월 31일 북부에 대한 폭격을 부분 중단하기로 했다. 1968년 5월 13일 파리에서 미국과 북베트남 간에 개시된 평화 회담(1969년 1월부터 남베트남과 FNL도 참여)은 거의 5년 가까이 답답한 진행을 이어갔다. 이 기간 미국은 '베트남화' 정책을 선택했는데, 이는 남베트남군이 공산 세력과 단독으로 싸울 수 있도록 충분한 수단을 제공하면서 미군을 단계적으로 철수시키는 전략이었다.
1968년 11월 존슨 대통령이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을 전면 중단하자, 새로 선출된 닉슨 대통령은 1969년 6월부터 미군 병력의 귀환을 시작했다. 반면 공산 세력은 공세를 조금도 늦추지 않았고, 이에 미국은 1970년 캄보디아에 개입하고 북부에 대한 공습을 재개했으며, 1972년 5월에는 북베트남 항구를 봉쇄하고 하노이와 하이퐁에 전쟁 내내 가장 격렬한 폭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1969년 8월 파리 회담의 별도 축에서 키신저와 레득토 사이에 시작된 비밀 협상은 결실을 맺어 1973년 1월 27일 파리 평화 협정 체결로 이어졌고, 이에 따라 미군은 두 달 안에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협정에는 교전 각 세력 간 정전과 민족 화합을 위한 정치적 조항도 담겼지만, 남북 어느 쪽도 이를 준수하지 않고 오히려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 했다.
1969년 6월 잠정혁명정부(GRP)로 재편된 FNL은 계속해서 북베트남으로부터 병력과 장비를 지원받았다. 극도로 부패했던 남베트남 정권은 미국의 물적 지원에도 불구하고 비엣콩의 압박을 버텨내지 못했다. 1974년 말 공산 세력이 대규모 공세를 재개했고, 1975년 봄에는 후(3월 24일)와 다낭(3월 29일)을 함락시키며 남베트남군은 와해되었다. 너무 늦은 티에우 대통령의 사임(4월 21일)으로 정치 협상의 여지는 사라졌다.
베트남 전쟁의 종결
크메르 루즈가 이미 캄보디아를 장악한 가운데, 공산군은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에 입성했다. 제2차 베트남 전쟁은 베트남은 물론 인도차이나 전역에서 공산주의의 완전한 승리로 끝났다. 이데올로기를 넘어 이 결과는 베트남 역사의 일관된 흐름, 즉 더 권위주의적이고 중앙집권적인 북부의 남부 지배라는 명제를 확인시켜 주었다. '호찌민시'로 이름이 바뀐 사이공에서 서양의 흔적은 말끔히 제거되었고, 남베트남에는 사회주의 체제가 점진적으로 구축되었다.
베트남의 통일은 1976년 상반기로 예정된 선거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하노이가 통일 베트남의 수도로 결정되어 있었다. 1946년 1월 8일 선거 이후 처음으로 1976년 4월 25일 남북 베트남 주민들이 하나의 국회를 선출했고, 두 달 뒤 이 국회는 새 헌법을 채택하며 국가 통일을 비준했다.
20세기에서 가장 유명한 전쟁 중 하나인 이 전쟁은 언론 보도와 미국 여론이 차지한 비중 면에서 특별했다. 극도로 폭력적이었고 수많은 만행으로 점철된 이 전쟁은 수백만 명의 희생자를 냈으며(그 대다수는 베트남 민간인), 미군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큰 손실(5만 8,000명 전사)을 입었다.
이 전쟁은 미국인들의 정신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사회주의 공화국이 된 통일 베트남에서는 '재교육' 수용소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곧 수천 명의 반체제 인사들이 바다를 통해 국외 탈출을 시도했다. 일부 '보트피플'은 비정부기구(NGO)의 구조를 받았지만, 다수는 해적과 굶주림의 희생물이 되어 목숨을 잃었다.
참고 문헌
- 마틸드 텔리올(Mylène Théliol), 『베트남 전쟁: 냉전의 한복판에서 벌어진 치명적 분쟁』, 50 Minutes, 2017.
- 데니스 웨인스톡, 로버트 밀러, 『인도차이나와 베트남: 35년의 전쟁 1940~1975』, New World, 2019.
- 『베트남 전쟁과 미국 여론 1961~1973』, 소르본 출판사, 1995.
더 읽을거리
- 다니엘 코스텔, 이자벨 클라크 감독 다큐멘터리 『베트남 전쟁』, DVD,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