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안티고노스 모노프탈모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들 중 최후의 통합자

안티고노스 모노프탈모스(기원전 382년경~기원전 301년)는 마케도니아 출신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디아도코이(후계자들) 중 가장 강력하고 야심 찬 인물로 평가받는다. '모노프탈모스(Monophthalmos)'라는 별명은 '외눈박이'를 뜻하며, 페린토스 공성전 중 눈에 화살을 맞고도 물러서지 않은 일화에서 유래했다. 플루타르코스는 그를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들 중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 칭했다.

출생과 초기 생애

안티고노스는 기원전 382년경 마케도니아에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필리포스였고, 모친은 이후 펠라 궁정의 유력 귀족 페리안드로스와 재혼했다. 그의 이복형 마르시아스는 알렉산드로스 왕자와 함께 자랐는데, 이는 안티고노스 가문이 아르게아다이 왕가와 긴밀한 관계였음을 시사한다.

기원전 359년 필리포스 2세가 즉위할 때 안티고노스는 23세였다. 필리포스 2세의 치세 동안 마케도니아는 군사적 잠재력을 확보하고 주변국에 대한 패권을 확립했다. 안티고노스의 이 시기 행적은 자세히 전해지지 않으나, 디오도로스 시쿨로스는 그가 안티파트로스, 에우메네스 등 궁정의 핵심 인물들과 두터운 친분을 맺고 있었음을 기록한다. 알렉산드로스 즉위 후 그에게 중요한 직책을 맡긴 점을 볼 때, 이미 궁정이나 군부에서 상당한 입지를 다져온 것으로 보인다.

아시아 원정과 프리기아 총독 시절

기원전 334년 알렉산드로스의 아시아 원정에 안티고노스는 7,000명의 그리스 연합군을 이끌고 참전했다. 그라니코스 강 전투에서 그리스 연합군 지휘관을 맡았을 가능성이 높으며, 소아시아 전역에서 활약했다. 프리에네 시에서 발견된 비문에 따르면 그는 페르시아 통치를 종식시키고 민주정을 복구한 공로로 특권을 받았다.

기원전 333년 알렉산드로스는 그를 프리기아 총독으로 임명했다. 이는 소아시아의 도시들을 지키고 유럽과의 연락선을 유지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안티고노스는 켈레나이 요새에 남아있던 페르시아 잔존 세력(카리아인들과 그리스 용병들)을 1,500명의 용병으로 포위해 항복을 받아냈고, 이들은 그의 병력에 합류했다.

이수스 전투 이후의 위기 관리

이수스 전투(기원전 333년) 대승 후에도 소아시아에는 페르시아 세력이 남아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주력군이 페니키아 해안으로 남하한 사이, 안티고노스는 소아시아에서 페르시아의 반격을 막아내야 했다. 병력이 열세였음에도 지형을 활용해 페르시아군을 세 부대로 나누어 각개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공적으로 파르메니온, 크라테로스 같은 명장들과 견줄 만한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제국 분할과 디아도코이 전쟁의 서막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가 바빌론에서 죽자, 마땅한 후계자가 없는 상황에서 장군들은 권력 다툼에 돌입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죽기 전 페르디카스에게 왕반지를 주며 '가장 강한 자에게(tôi krastíroi)'라고 했지만, 이는 '크라테로스에게(tôi Kraterôi)'의 오기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바빌론 회의에서 안티고노스(당시 60세)의 참석 여부는 불확실하다. 회의가 알렉산드로스 사망 일주일 만에 열렸기에 소아시아에서 이동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그러나 그는 프리기아 총독직을 유지하고 소아시아 서부 지역을 추가로 배정받아 확고한 세력 기반을 확보했다. 페르디카스는 그가 카파도키아와 파플라고니아를 차지하려는 에우메네스를 돕길 원했으나, 안티고노스는 이를 거부했다.

트리파라디소스 협정과 제2차 디아도코이 전쟁

기원전 320년 프톨레마이오스가 알렉산드로스의 시신을 탈취하자 페르디카스는 이집트 원정에 나섰다가 암살당했고, 크라테로스는 에우메네스와 싸우다 전사했다. 기원전 321년 트리파라디소스 협정으로 영토가 재분할되었다. 안티파트로스가 마케도니아에서 섭정이 되었고, 안티고노스는 기존 영토에 팜필리아와 리카오니아를 더해 아시아 총독(strategos)에 임명되었으며, 에우메네스 축출 임무를 맡았다.

기원전 319년 안티파트로스가 죽고 폴리페르콘을 후계로 지명하자, 아들 카산드로스가 반발해 안티고노스, 프톨레마이오스, 리시마코스와 손잡고 에우메네스-폴리페르콘 진영과 맞섰다. 안티고노스는 가비에네 전투에서 에우메네스의 은방패병(아르규라스피데스) 짐수레와 가족들을 포획해 협상 카드로 삼아 에우메네스를 제거했다.

아시아의 패자, 안티고노스

에우메네스 제거 후 안티고노스는 소아시아 총독령과 셀레우코스로부터 탈취한 바빌론을 장악하며 '아시아의 대군주'로 군림했다. 그는 알렉산드로스 4세의 수호자를 자처하고 그리스 도시들의 자치를 선언해 카산드로스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기원전 315년 제3차 디아도코이 전쟁이 발발했고, 아들 데메트리오스가 우완으로 활약하며 초반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전쟁은 기원전 310년 안티고노스의 부분적 패배로 끝났으나, 셀레우코스와의 분쟁은 계속되었다. 카산드로스가 알렉산드로스 4세와 로크사네를 살해하며 아르게아다이 왕조가 단절되자, 안티고노스는 본격적으로 왕위를 노리게 된다.

에게 해 진출과 살라미스 해전

기원전 307년경 안티고노스는 에게 해로 눈을 돌려 아들 데메트리오스를 그리스에 파견했다. 데메트리오스는 아테네에서 마케도니아 파를 축출하고 부자(父子)는 '해방자'로 추앙받았다. 위기를 느낀 프톨레마이오스는 카산드로스와 동맹해 키프로스를 지키려 했으나, 기원전 306년 살라미스 해전에서 데메트리오스에게 대패했다. 이 승리로 안티고노스는 바실레우스(왕)를 자칭하며 동방 통일의 길에 나섰다.

이집트 원정은 폭풍으로 데메트리오스 함대가 손실돼 실패했고, 로도스 공성전에서도 로도스인의 완강한 저항으로 철수해야 했다. 데메트리오스는 이 공성전으로 '폴리오르케테스(도시 공격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기원전 304년 데메트리오스가 다시 그리스로 가 카산드로스를 몰아내자, 카산드로스는 리시마코스, 프톨레마이오스, 셀레우코스와 연합해 안티고노스의 본거지인 아시아를 압박하는 전략을 취했다. 안티고노스는 리시마코스 패배설을 흘려 프톨레마이오스를 철수시키는 책략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최종 결전은 기원전 301년 입수스에서 벌어졌다.

입수스 전투: 최후의 결전

입수스 전투는 디아도코이 전쟁의 종지부를 찍은 최대 규모 전투였다. 안티고노스군(보병 7만, 기병 1만, 코끼리 75마리)과 셀레우코스-리시마코스 연합군(보병 6만 4천, 기병 1만 5백, 코끼리 400마리, 낫전차 120대)이 격돌했다. 안티고노스군의 그리스-마케도니아 보병과 기병이 질적 우위에 있었으나, 연합군의 압도적인 코끼리 전력이 변수였다.

전투 초반 데메트리오스가 지휘하는 우익 기병이 셀레우코스의 아들 안티오코스를 격파하고 돌진했으나, 지나치게 추격하다 본대에서 멀어졌다. 셀레우코스는 예비 코끼리 부대로 데메트리오스의 귀환을 차단했고, 경기병으로 안티고노스 본진의 측후방을 위협했다. 전열이 무너진 안티고노스군은 와해되었고, 안티고노스는 아들 데메트리오스가 구원하리라는 믿음으로 도망치지 않고 전사했다. 향년 81세. 그의 시신은 친구 토락스가 지켰고, 셀레우코스의 명령으로 왕다운 장례를 치렀다.

평가와 유산

고대 사료들은 안티고노스를 과도한 야망의 희생양으로 묘사하나, 그의 야망은 카산드로스, 페르디카스, 셀레우코스 등 동시대 인물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는 10여 년간 아시아를 지배하며 알렉산드로스 제국 재통합에 가장 근접했던 인물이다. 사후 아들 데메트리오스는 셀레우코스의 인질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으나, 손자 안티고노스 고나타스가 마케도니아 왕위를 되찾아 안티고노스 왕조를 열었다.

추천 문헌

  • Billows, R. (1997): Antigonos the One-eyed and the creation of the Hellenistic stat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 데스페르타 페로 안티과 이 메디에발 제8호: 디아도코이, 알렉산드로스 제국을 둘러싼 형제살해 전쟁
  • 데스페르타 페로 안티과 이 메디에발 제27호: 알렉산드로스 대왕 (I) - 펠라에서 이수스까지
  • 데스페르타 페로 안티과 이 메디에발 제33호: 알렉산드로스 대왕 (II) - 티레에서 시와까지
  • 데스페르타 페로 안티과 이 메디에발 제47호: 알렉산드로스 대왕 (III) - 가우가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