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티라덴치스: 브라질 독립 운동의 상징, 이나콘피덴시아 미네이라의 영웅

티라덴치스(Tiradentes)는 식민지 브라질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이른바 '이나콘피덴시아 미네이라(Inconfidência Mineira)'의 상징이 된 인물입니다.

티라덴치스: 브라질 독립 운동의 상징, 이나콘피덴시아 미네이라의 영웅

티라덴치스는 누구인가?

티라덴치스는 포르투갈어로 '이빨을 뽑는 자'라는 뜻의 별명으로, 본명은 조아킹 조제 다 실바 사비에르(Joaquim José da Silva Xavier)입니다. 그는 이나콘피덴시아 미네이라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으며, 공모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교수형이라는 사형 선고를 받았던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1746년 11월 12일, 당시 식민지 브라질의 미나스제라이스 카피타니아에서 태어났습니다. 조아킹 조제는 여러 직업을 전전했는데, 그중 아마추어 치과 의사 일을 했기 때문에 '티라덴치스'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치과 외에도 짐꾼(트로페이루), 광부, 행상 등의 일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에게 안정을 가져다준 유일한 직업은 미나스 왕립 용기병대의 소위(少尉) — 중위 바로 아래 계급 — 자리였습니다. 이 부대는 미나스제라이스 카피타니아에서 활동하며 포르투갈 왕실에 예속된 군대였습니다.

'퀸투'와 '데하마': 반란의 도화선

티라덴치스는 지식인은 아니었지만 정치적 저술에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특히 1776년에 독립한 미국의 헌법에 주목했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30세였습니다. 조아킹 조제 다 실바 사비에르의 정치적 관심사는 점차 당시 브라질 광업 활동의 중심지였던 빌라리카(Vila Rica) 주민들의 이해관계와 맞닿아 갔습니다.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에 밝은 시인 클라우지우 마누엘 다 코스타와 토마스 안토니우 곤자가 같은 인텔리겐치아가 티라덴치스가 함께한 핵심 인물들이었으며, 이들은 포르투갈 왕실이 임명한 미나스제라이스 총독 바르바세나 자작(Visconde de Barbacena)을 권력에서 몰아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반란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요?

티라덴치스와 이나콘피덴시아 관련자들이 바르바세나 총독 정부와 포르투갈 제국에 맞서 일어선 가장 큰 이유는 과도한 세금으로 인해 지역의 부가 끊임없이 유출되었기 때문입니다. 포르투갈 왕실은 미나스제라이스에서 생산된 금에 대해 소위 퀸투(quinto), 즉 총 채굴량의 약 20%에 해당하는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그런데 1760년대부터 금 채굴량이 크게 감소했음에도 세금 액수는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퀸투 세율은 현지 광부들에게 계속 요구되었고, 바르바세나 총독은 법을 강제 집행하기 위해 물리적 폭력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티라덴치스: 브라질 독립 운동의 상징, 이나콘피덴시아 미네이라의 영웅
오루프레투(Ouro Preto), 옛 빌라리카 — 이나콘피덴시아 미네이라 음모가 벌어진 도시

문제는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미수납된 퀸투 세금을 만회하기 위해 포르투갈 왕실이 소위 데하마(derrama)라 불리는 제도를 승인한 것입니다. 데하마는 광산 쇠퇴로 인해 왕실에 납부하지 못한 세금 차액을, 광부들이 자신의 재산 — 즉 가치 있는 모든 소유물 — 로 메우도록 강제하는 제도였습니다. 이는 도로 사용료, 노예 매매 등 다른 방식으로까지 세금을 걷어야 했다는 의미이며, 결국 모든 사람이 데하마의 부담을 떠안아야 했습니다.

이나콘피덴시아: 음모의 시작

이나콘피덴치(공모자)들의 음모는 1788년부터 준비되기 시작해 이듬해 본격적인 행동에 옮겨졌습니다. 연구자 루카스 피게이레두(Lucas Figueiredo)가 저서 보아벤투라! 브라질의 골드러시(1697~1810)에서 언급했듯이, 티라덴치스는 활동적인 성격 탓에 이나콘피덴치 중 가장 급진적인 인물로 알려졌습니다.

"온건파들 사이의 급진파였던 그는 — 창관부터 부유한 상인의 저택까지 어디서든 공개적으로 — 미나스제라이스를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시키는 혁명을 주창했다. '이토록 부유한 나라들이 유럽이라는 스펀지가 모든 실질을 빨아들이기만 하는 탓에 극심한 궁핍에 빠지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고 그는 말했다."

티라덴치스는 심지어 바르바세나 자작의 암살까지 모의했지만, 공모자 중 한 명인 조제 실베리우 두스 헤이스(José Silvério dos Reis)의 고백으로 음모가 발각되면서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고, 관련자 전원이 체포되었습니다.

투옥, 처형, 그리고 영웅화

체포된 이나콘피덴치 다수는 가혹한 처벌이 두려워 자신의 죄를 자백하지 않았습니다. 유일하게 자백한 사람이 바로 티라덴치스였고, 바로 그 이유로 그는 가장 무거운 형벌을 받았습니다. 리우데자네이루 시에서 진행된 재판은 1792년 4월 21일에야 끝났습니다. 티라덴치스는 교수형에 처해 참수된 뒤 사지가 분획되었습니다. 왕실의 신민들이 이 교훈을 결코 잊지 않도록, 그의 머리는 창에 꽂혀 빌라리카의 공공 광장에 전시되었고, 사지는 리우데자네이루로 이어지는 길가에 흩어져 내걸렸습니다.

주목할 점은, 제정 시대와 공화정 시대를 통틀어 티라덴치스의 이미지가 브라질의 자유와 독립의 아이콘, 즉 민족 영웅으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입니다. 이 이미지는 회화(본문 첫머리의 이미지는 페드루 아메리코(Pedro Américo)의 작품입니다)와 기념물(1867년 오루프레투 시에 세워진 첫 기념비 등)을 통해 끊임없이 강화되었습니다. 1965년, 브라질 군사정권 초기에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원수 카스텔루 브랑쿠(Castelo Branco)가 12월 9일자 제4.897호 법률에 서명하며 이 흐름에 힘을 보탰습니다. 이 법률은 4월 21일을 국경일로 선포하고, 티라덴치스를 공식적으로 브라질 국가의 수호자(파트론)로 지정했습니다.

각주

[1] FIGUEIREDO, Lucas. Boa Ventura! A corrida do ouro no Brasil (1697-1810). Rio de Janeiro: Record, 2011. p. 295.

[2] Ibid., p. 297.

글: 클라우디우 페르난데스(Claudio Fernand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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