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라피크 메리(Seraphic Mary)호의 도면. 낭트(Nantes)의 그뤼엘(Gruel) 씨가 앙골라 항해를 위해 무장시킨 이 배는 선창에는 통을 싣고 갑판 아래 좁은 선실에는 307명의 노예를 빽빽하게 수용했습니다. 판화, 1770년 • WIKIMEDIA COMMONS
100만 명의 생명을 삼킨 바다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약 25,000개의 노예 수송 선단이 대서양을 횡단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이 항해 중 443척이 난파했고, 148차례의 원정이 바다에서 행방불명되었습니다. 이는 노예선의 선원들에게도 얼마나 험난하고 위험한 여정이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가장 큰 대가를 치른 것은 단연코 아프리카인들이었습니다. 밀집된 환경으로 악화된 질병, 그리고 선원들에게 가해진 잔혹한 처벌과 학대 속에서 항해 도중 10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오늘날 '중간 항로(Middle Passage)'라 불리는 이 바닷길은 역사상 가장 비참한 강제 이주의 현장이었습니다.
"상품"으로 취급된 수용 환경
여성과 아이들은 경우에 따라 낮에는 갑판 위에서 지낼 수 있도록 허용되었지만, 남성들은 갑판 아래 좁은 선실에 유폐되었습니다. 19세기 초의 한 문서는 당시의 밤 풍경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매일 저녁 부함장과 부관은 채찍을 들고 '선창'으로 내려가 흑인들의 밤 자리를 정한다. 우현 쪽 사람들은 앞을 향해 숟가락처럼 서로 끼워 눕게 되고, 좌현 쪽은 선미를 향해 눕는다. 좌현이야말로 숨을 잘 쉴 수 있는 최선의 자세다."
철저한 감시와 가혹한 처벌
노예선 승무원들에게 안전 확보는 무엇보다 중요한 관심사였습니다. 노예들은 특히 항해 초반에 철저히 감시당했습니다. 포로들이 아직 아프리카가 가깝다는 감각을 잃지 못한 상태에서 공격적으로 변하고 절망적인 행동에 나설 가능성이 컸기 때문입니다. 반항이나 폭동이 일어나면 극도로 잔혹한 처벌이 뒤따랐습니다.
1737년 라프리카앵(L'Africain)호에서 노예 반란이 일어난 후, 장교들은 네 명의 주동자를 붙잡아 갑판에 엎드려 채찍질한 뒤, 칼로 허벅지를 내리고 상처에 화약, 레몬즙, 고춧가루를 뿌렸습니다. 한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그 이유는 "괴저를 막고, 고통이 더욱 타오르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열악한 식사와 썩은 물
노예들의 식사는 쌀, 카사바(카사바 가루), 콩을 끓여 만든 수프였고, 가끔 생선이 곁들여졌습니다. 값싸게 조달할 수 있는 메뉴였지만, 노예 무역선 선장에게 가장 큰 두려움 중 하나였던 전염병의 확산을 막기 위한 실용적인 선택이기도 했습니다.
물은 더욱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한 목격자는 "항해 중 두세 번씩 부패하여 걸쭉하고 탁해지며, 때로는 벌레가 가득하다"고 증언했습니다. 다만 노예들이 전체적으로 순종적으로 행동했을 때는 가끔 브랜디나 비스킷, 혹은 삶은 소고기 한 조각을 나누어 주는 것이 관행이었다고 합니다.
기록으로 본 실제 노예선, 아우로르호
광범위한 사료 덕분에 프랑스 노예선 아우로르(Aurore)호의 구체적인 모습을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 최대의 노예 무역항이던 낭트에서 1784년 진수된 이 배는 약 300톤급의 3돛대 범선으로, 45명의 승무원이 탑승했으며 선창에는 최대 600명의 노예를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배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되었습니다. 승무원이 활동하는 갑판, 노예들이 갇힌 선실, 그리고 미국행 항해 동안 식수 통으로 채워졌다가 유럽으로 돌아갈 때는 설탕 통을 실은 선창이 그것입니다. 출발과 귀환에 따라 선창의 용도가 완전히 달라지는 모습은, 노예 무역이 하나의 '삼각 무역' 시스템으로 운영되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