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1748) 중 슐레지엔을 침공·병합한 프리드리히 대왕의 행보는 1745년 드레스덴 강화 조약으로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지만, 그는 이것이 단순한 휴전임을 잘 알고 있었다. 1752년 작성한 비밀 '유언장'에서 그는 프로이센이 '가장 심각하게 해를 끼친' 나라가 오스트리아이기에 평화는 일시적 휴전일 뿐이라고 적었다. 1749년경 그는 1754~1755년 전쟁이 발발해 독일 내 패권을 두고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결판날 것이라 예견했다. 또한 갈등이 재개되면 프로이센이 팽창주의 정책을 이어가기에 유리한 위치에 있으리라 판단하며, "마리아 테레지아에게서 보헤미아를 빼앗고 싶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그는 보헤미아를 탐내는 작센 선제후령과 교환할 계획이었다. 그 결과 프리드리히는 이전 전쟁이 끝난 날부터 다음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준비 단계
1756년 여름, 프로이센의 군자금은 약 1,650만 탈러에 달했고, 프리드리히의 계산으로는 세 번의 전역을 치르기에 충분했다. 여기에 보병 한 명당 여벌 군복 한 벌, 포병 탄약 두 전역 분량, 기병 전력을 두 배로, 보병을 50% 증강할 무기가 비축돼 있었다. 1752년부터는 10만 대군을 18개월간 먹일 보급 창고도 마련해뒀다. 하지만 프리드리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춰도 적들이 동원할 전력엔 미치지 못함을 깨달았다. 제2차 슐레지엔 전쟁 직후 그는 『전쟁 일반 원칙』이란 원고를 써서 1753년 극비리에 장군들에게 돌렸다. 프로이센은 장기전을 감당할 수 없으므로 전쟁은 "짧고 단호해야 하며", 속도와 공세로 결전을 통해 신속히 승부를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프리드리히는 1756년 이 구상으로 전쟁을 시작했지만, 전쟁의 종지부를 찍을 결정타는 1757년 전역이 돼서야 가능하리라 계산했다. 첫 해엔 체스판 위에 말을 배치해 이듬해 승리를 보장하는 데만 집중하려 했다. 그 유리한 판세엔 작센 선제후령과 북부 보헤미아 점령이 필수였다. 적지에 동계 영지를 마련하고 결정적 작전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계획의 첫 단계는 상당한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1756년 보헤미아 침공 중 합스부르크 원수 막시밀리안 울리세스 폰 브라운에게 전술적으로 농락당해 로보지츠(현 로보시체)에서 발이 묶였고, 10월 말 작센으로 후퇴해야 했다. 그래도 프리드리히의 전략적 목표는 1757년 전역에서 전쟁을 끝낼 결전, 곧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파르살루스 전투 같은 한 판 승부였다. 한편 빈에서는 프로이센이 작센을 차지한 막대한 이점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 전쟁 내각(국가 수상 카우니츠 백작 주도로 개전 초 구성)은 로보지츠 전역 후 전망이 훌륭하다고 확신했다. 군사력을 아껴 다음 작전에서 더 효과적으로 타격하자는 데 의견이 모였지만, 1757년 내 전쟁이 끝날 거라 믿는 이는 드물었다. 겨울 동안 카우니츠는 프랑스·러시아와 공격적 동맹을 맺어(프리드리히가 전쟁을 벌여 피하려던 바로 그 연합) 신성 로마 제국 의회로부터 프로이센 선전 포고를 받아냈다. 오스트리아인들은 이런 정치적 이점이 결국 적을 무릎 꿇릴 거라 믿었기에, 1757년 목표는 프로이센 점령지(작센, 루사티아, 특히 슐레지아)에 확고한 교두보를 마련해 차기 전역들의 공세 기반으로 삼는 것이었다.
겨울 내내 오스트리아를 괴롭힌 또 다른 문제는 최고 군사 지휘권이었다. 카우니츠는 결핵으로 쇠약해가던 브라운을 지지했고, 중앙 내정 기구인 디렉토리움을 이끄는 하크비츠 백작은 레오폴트 다운 원수를 밀었다. 반면 황제 부부, 프란츠와 마리아 테레지아는 지난 전쟁에서 참담한 성적을 보인 로렌의 카를 알렉산더 공을 밀어줬다.
오스트리아군은 북부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전역에 주둔해 있었고, 전쟁 내각이 동원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동안 보급은 통제되고 있었다. 2월 말 열린 군사 회의에서 브라운이 짜서 제출한 4개 대형 진영 집결안이 승인됐고, 작센이나 슐레지아 공세의 이점도 논의됐으나 당장은 북부 국경 방어 태세를 취하기로 했다. 하지만 프랑스 무관이 "프로이센이 5월 초 전엔 어떤 대규모 행동도 못 한다"고 장담해 불필요한 행군으로 군을 지치게 할 필요 없다며 집결이 미뤄졌다. 한편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체스판'이 예상대로 짜이지 않자 전략을 망설였다. 동맹의 공세가 닥치면 그때 싸우자는 생각도 했으나, 최측근 두 장군(한스 카를 폰 빈터펠트 중장, 쿠르트 크리스토프 폰 슈베린 원수)이 방어적 태세를 만류하며 오스트리아 선제 공격을 독촉했고, 4월 초 프리드리히는 계획을 승인하는 데 그치지 않고 확대했다.
국왕은 전 병력 약 11만 6,000명을 대규모 공세에 투입해 4개 종대로 보헤미아 깊숙이 진격시키기로 했다. 한 군은 작센 서부에서 에거(오흐르제) 강 계곡을 따라, 다른 한 군은 드레스덴에서 엘베 강 서안을 따라 내려오며 합류한다. 동쪽에선 세 번째 군이 슐레지아에서 트라우트나우(트루트노프)로, 네 번째 군이 루사티아에서 융분츨라우(믈라다 볼레슬라프)로 넘어와 라이트메리츠(리토메르지체) 인근에서 두 대부대가 합류, 오스트리아 주력군을 격파해 전쟁을 끝낸다는 구상이었다. 
이에 1757년 4월 18일, 균형을 프로이센 쪽으로 기울일 '큰 한 방'인 보헤미아 침공이 시작됐다. 최고 사령관으로 낙점된 로렌의 카를은 완전히 허를 찔렸고, 열흘 만에 네 개 침공군이 거대한 집게가 되어 합스부르크군을 프라하 쪽으로 몰아넣었다. 브라운은 적이 합류하기 전 한 쪽을 치자고 했지만, 카를은 프라하 근처에 진을 치고 남동부 보헤미아에서 다운 원수의 제2군이 도착해 수적 우위를 점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 결과 5월 6일 프로이센의 거대한 집게가 닫히며 수적 우세로 공격을 개시했다.
프라하 전투
오스트리아군은 프라하 동쪽 고지대에 두 줄로 진을 쳤다. 상황을 파악한 프리드리히는 정면 북쪽 공격을 포기하고 오스트리아 우익을 우회하는 측면 기동을 택했다. 연병장에선 잘 먹히지만 적이 간파하면 자살 행위가 될 수 있는 전술이었다. 제2선을 지휘하던 브라운이 기동을 간파해 반격에 나서자 프로이센 진격이 무너졌고, 일부 연대가 무너지며 강제로 편입된 작센 부대들이 순식간에 전향했다. 슈베린 원수가 부대를 수습하려다 전사했고, 브라운은 포탄에 치명상을 입고 후송됐다.
격전 중 프리드리히는 보이지 않았다. 훗날 그는 복통으로 전장을 떴다고 해명했다. 왕의 명령 없이 연대장들 자발적으로, 오스트리아 주력 전선(동서향)과 브라운의 반격선 사이, 키예 남쪽 틈을 파고들었다. 거의 혼수상태였던 카를은 증원병을 보내 틈을 메우지 못했고, 브라운의 우익은 기병에 묶인 채 한스 요아힘 폰 치텐 장군의 프로이센 후사르에게 측면을 찔렸다. 그 순간 카를이 흉통으로 실신해 후송됐다. 지휘부 공백 속에 오스트리아 반격은 약해졌고 치열한 저항 끝에 후퇴했다. 오후 중반, 주력 전선이 프로이센의 성공적 우회 포위에 직면하자 연대장들은 프라하 성벽으로 철수를 명령했다.
프로이센이 전술적 승리를 거뒀다. 기병의 결사적 반격 덕에 오스트리아 주력군이 궤멸되지 않고 성벽 뒤로 온전히 퇴각했다. 합스부르크군은 완강하고 효과적으로 싸웠고, 전년 로보지츠처럼 프로이센 피해가 더 컸다(프로이센 14,400명 vs 오스트리아 13,400명, 이 중 4,500명은 포로). 패인은 지휘부에 있었다. 군대 전체가 패배했음에도 당장은 전멸을 면했지만, 프리드리히는 곧 항복하리라 낙관했다. 소식으론 오스트리아군 잔여 병력만 남쪽으로 빠졌고 주력은 시내에 갇혔기에 머지않아 항복, 그러면 빈은 강화 회담에 나서고 전쟁은 끝날 터였다.
프라하 포위전
프로이센엔 공성 장비가 없었지만, 시내 식량이 한정돼 기아로 조기 항복을 기대했다. 5월 말 공성포가 도착했으나 5일 포격에도 항복 조짐이 없자, 프리드리히는 오스트리아 구원군이 포위 완료 전 개입할까 걱정됐다. 다운을 잘 몰랐지만 예방 차원에서 베베른 공작에게 2만 4,600명을 줘 구원군 저지 임무를 맡겼다. 빈에서 카우니츠는 1756년 가을 느린 기동과 1757년 4월 안이한 집결이 왕정을 위태롭게 했음을 깨닫고 행동을 재촉했다. 다운의 증원이 제때 안 닿으면 재앙이라 경고했다.
6월 8일 카우니츠는 다운에게 프라하 구원 공세를 명령했다. 다운은 12일 진군했고, 같은 날 프리드리히는 증원 오기 전 다운을 치기로 결심했다. 13일 첫 교전에서 프로이센 선봉이 쿠텐베르크(쿠트나 호라)에서 격퇴당했다. 그날 프리드리히가 베베른 진영에 증원병을 합류시켜 프로이센 주력 약 4만 명을 집결시켰고, 15일 이 부대가 프라하에서 동쪽 콜린(콜린) 시로 진격했다.
콜린 전투
양측의 병력 오판이 전투 양상을 갈랐다. 다운은 프리드리히가 6만 명으로 온다 들었지만, 실제 오스트리아 병력 5만 3,000명이 프로이센보다 많았다. 신중한 다운은 프라하~빈 가도(캬이저 슈트라세) 남쪽 언덕, 콜린 서쪽 플라니아니(플라나니)와 초체니체(초체니체) 근처에 북남으로 진을 치고 프로이센을 기다렸다. 6월 17일 정찰 결과 다운이 정면 공격 불가능한 강력한 북남 진영을 갖췄음을 안 프리드리히는 군을 북쪽으로 돌려 캬이저 슈트라세를 따라 동쪽 콜린으로 우회, 오스트리아 우익을 감싸려 했다. 18일 아침 프로이센 전군은 플라니아니 동쪽 가도에 진을 쳤다. 교회 첨탑에 오른 프리드리히는 경악했다. 다운이 야간 기동으로 전선을 동서로 돌려, 초체니체 중심의 언덕 능선에 캬이저 슈트라세를 내려다보게 배치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프리드리히는 물러서지 않고 우익 포위 기도를 유지했다. 선봉 요한 디트리히 폰 휘센 장군과 치텐의 기병이 가도를 따라 크르체호르츠(크르체호르츠) 마을에서 남쪽으로 틀어 오스트리아 신우익을 치려 했다. 초반엔 순조로웠으나 휘센이 언덕 정상에 오르자 다운이 예비대 하인리히 카를 폰 비트 사단을 그 구역에 투입해 효과적으로 대응했다. 뤼켈 장군의 치열한 저항으로 다운이 우익에 예비대를 더 투입하게 만들었는데, 이 병력 이동으로 일어난 먼지를 보고 프리드리히는 주능선 주력이 약해졌다고 오판해 정면 돌격을 감행했다. 다시 한 번 상대를 과소평가한 셈이다. 거듭된 프로이센 공격은 오스트리아 포병과 보병 화력에 격퇴됐다. 오후 늦게 초체니체 동쪽에서 진전이 보이는 듯했으나 오스트리아 기병의 성공적 반격이 보병을 무너뜨리며 전투는 궤주로 끝났다. 프리드리히의 첫 대패였고, 정예 부대가 큰 타격을 입었다(프로이센 약 1만 4,000명 vs 오스트리아 약 9,000명).
후폭풍
콜린 전투로 오스트리아 진영엔 환희가 일었으나 다시 대규모 결전을 벌이려는 의욕은 크지 않았다. 황제 부부는 큰 전투 없이 프리드리히를 보헤미아에서 몰아내자고 제안했는데, 어차피 프리드리히가 보헤미아에 남을 뜻이 없었기에 불필요한 제안이었다. 프로이센 측은 영국 대사 보고대로 "낙담, 불만, 불안"으로 가득 찼다. 콜린 전투의 즉각적 전략적 효과는 프리드리히를 전례 없는 속도로 보헤미아에서 철수하게 만든 것이었다. 철수는 약 3만 5,000명씩 두 개 종대로 이뤄졌고, 국왕이 동생 하인리히 공, 제임스 키스 원수와 함께 엘베 강 계곡으로, 다른 동생 빌헬름 공이 우안 루사티아 쪽으로 각각 이끌었다.
철수는 양측에 중요한 파장을 낳았다. 오스트리아 쪽에선 포위군이 빠지자 카를이 출격해 잠시 추격했는데, 이 사소한 행동이 빈에 전해지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를 대단한 군사 작전이자 카를의 장군 자질 시험으로 받아들였다. 6월 23일 다운이 프라하에 도착하자 최고 지휘권이 다운에게 넘어갔고, 이는 훗날 재앙적 결과를 낳았다. 프로이센 쪽에선 철수 과정에서 프리드리히가 장군들, 특히 동생 아우구스트 빌헬름을 질책하는 계기가 됐다. 오스트리아군 추격의 어려움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페렌츠 리포트 나다시 장군의 1만 2,500명(헝가리 후사르, 세르비아·크로아티아 국경 연대 기병·보병)이 국왕과 하인리히 공을, 주력 7만 3,000명과 경보병 8,000명이 빌헬름 공을 맹추격했다. 보헤미아 내 마지막 프로이센 거점 가벨(야블로네)이 7월 15일 요한 지그문트 마과이어와 카를 라이문트 폰 아렌베르크 장군에게 함락되며 오스트리아 주력이 루사티아로 추격할 길이 열렸다. 경보병 괴롭힘 속에 마지막 프로이센 병력이 7월 20일 국경을 넘을 때 보급품, 식량, 부교, 포병을 대량 잃었고, 강제 징집됐던 작센 병사 수천 명이 탈영했다.
1757년 보헤미아 전역에서 전략적 목표 달성에 실패한 프리드리히는 필사적으로 피하려던 장기전의 수렁에 빠졌다. 7월 말 주도권이 오스트리아와 동맹국으로 넘어가 작센, 루사티아, 슐레지아, 동프로이센으로 전선이 확대됐다. 그래도 프리드리히는 그해 말 로스바흐 전투(제국군·프랑스 격파)와 로이텐 전투(오스트리아 격파) 두 차례 결정적 승리로 전쟁 수행 능력을 지켰지만, 이 승전들도 전쟁을 끝낼 '한 방'은 아니었다. 전쟁은 5년 더 이어져 프리드리히를 패전 직전까지 몰았고, 러시아 여제 옐리자베타의 돌연한 죽음과 계승자의 편가르기라는 논리를 초월한 역사적 우연으로 간신히 살아남았다. 1756년 예방 전쟁을 일으킨 것 자체가 애초부터 오판이었을 수 있으나, 보헤미아 전역의 실패는 프리드리히의 전략적 사고뿐 아니라 전술적 운용에도 약점이 있음을 드러냈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규율 잡히고 사기 높은 군대를 가졌음에도 말이다. 이 결함 중 가장 치명적인 건 적에 대한 경멸이었다. 프로이센 궁정 영국 대사 앤드루 마이클스 경은 "우리의 불운은 프로이센 국왕의 군대가 과거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거둔 큰 성공 때문 […] 프로이센 폐하로 하여금 가장 유리한 진지에서조차 오스트리아를 몰아낼 수 있으리라 착각하게 만들었다"고 평했다.
참고 문헌
- Broucek, P. (1982): Der Geburtstag der Monarchie: Die Schlacht bei Kolin 1757. 빈: 오스트리아 연방 출판사.
- Duffy, C. (1985): Frederick the Great: A Military Life. 런던: 루트리지.
- Duffy, C. (2000): The Austrian Army in the Seven Years War, Volume 1: Instrument of War. 일리노이: 엠페러스 프레스.
- Showalter, D.E. (1995): The Wars of Frederick the Great. 런던: 롱맨.
- Szabo, F.A.J. (2008): The Seven Years War in Europe, 1756-1763. 할로우: 피어슨.
이 기사는 『데스페르타 페로 현대사(Desperta Ferro Modern History)』 23호에 게재되었으며, 차기호인 24호 '프리드리히 대왕: 프로이센의 부상'의 예고편으로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