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과달레테 전투와 비시고트 왕국의 멸망: 스페인을 바꾼 결정적 하루

이베리아 반도에 살던 그리스도교도들은 수 세기 동안 그 사건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했고, 일어난 일과 그 설명, 그리고 상상의 영역까지 모두 아울러 "스페인의 상실(la pérdida de España)"이라 불렀다. 성직자들은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다윗과 솔로몬, 그 후손들의 왕국이라는 성경적 모델을 끌어왔다. 이 관점에서 마지막 비시고트 군주들의 행실에 대한 신의 징벌이 강조되었는데, 이는 이미 성경의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바와 같이, 군주가 죄를 지으면 신이 그 왕국을 벌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9세기 말 북방에서 쓰인 아스투리아스 연대기에서는 위티자의 음란한 죄와 로드리고 왕으로의 계승이 강조된다. 시기가 불명확하지만 비교적 이른 시기에, 귀족 가문 간의 관계, 특히 이들이 왕과 맺는 관계를 중시하는 귀족적 인식 속에서 큰 매력을 지닌 전설적 요소들이 결합되었다. 한 귀족의 딸(플로린다 혹은 라 카바)에게 군주가 폭력을 가해 가문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모티브가 만들어졌고, 이로 인해 충성에서 해방된 그녀가 왕에게 복수하고 무슬림을 불러들여 왕국을 멸망시켰다는 이야기가 생겨났다. 이 사건은 침략이 일어난 시점이 로드리고 때였으므로, 그의 죄가 징벌을 불렀다는 논리로 위티자가 아닌 로드리고와 연결되었다. 이 모든 정교한 설명은 결국 그들에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실, 즉 타종교인들의 손에 그리스도교 왕국이 순식간에 무너진 까닭을 찾으려는 시도였다. 거기에는 배신 소식이 초기 사료에도 등장할 정도로 비극적 요소가 더해졌다.

무슬림의 팽창

이 모든 사건의 중심에는 하나의 결정적 현상이 있다. 무슬림의 팽창은 예언자 무함마드 생전에 시작되었으나, 636년 야르무크 강 전투 승리로 시리아, 팔레스티나 같은 옛 로마 속주들이 거의 즉시 무슬림 수중에 들어갔다. 637년 유프라테스 강 우안에서의 카디시야 전투 패배는 더 치명적이어서, 페르시아 제국의 대부분이 무슬림 정복자들의 손에 넘어갔다. 이 팽창의 역동성은 북아프리카로 이어지며 지중해 이쪽 해안에 결정적 변화를 가져왔다. 마그레브 지역에서 아랍인들은 내륙으로 진군해 673년 카이루안을 세우고, 698년 카르타고를 끝내 점령했다. 이 시기 동안 그들은 토착민들과, 해안가에서는 콘스탄티노플 제국의 잔존 세력과 싸웠다. 이 맥락에서 해협 지대에서 비시고트 왕국에 영향을 준 분쟁이 있었을 수 있으며, 검바 시기의 해전 기억이 그것일 수 있다.

710년경 아랍인들은 무사 이븐 누사이르의 지휘 아래, 제국의 통제하에 있던 세우타(셉템)를 점령했다. 이 도시는 율리아누스라는 인물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는 정복 과정과 후대의 전설에서 주역이 된다. 아프리카 연안의 항구와 선박 덕분에 이베리아 반도 상륙 작전이 가능해졌다. 대규모 병력이 해협을 건넜지만, 무사는 아프리카에 남아 부하 타리크 이븐 지야드에게 지휘를 맡겼다.

비시고트 왕정

한편 710년 왕 위티자가 죽었다. 그는 아버지 에기카와 공동 통치하다 702년부터 단독 군주가 되었다. 이 가문에도 계승 구상이 있었겠지만, 코르도바와 연고가 있는 귀족 로드리고가 무력을 동원해 권력을 장악했다. 우리한테 가장 중요한 사료 중 하나인 754년 무명 연대기는 귀족들의 합의(따라서 정통성) 요소를 전하면서 동시에 더 공격적인 행동도 있었음을 시사하나, 자세히 다루지 않는다.

비시고트 왕정은 어떤 가문에도 굳건히 뿌리내리지 못했다. 즉 결코 확실한 세습제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왕위 계승 때마다 여러 세력이 작동했다. 새 군주는 전임자(아버지)와의 공동 통치, 공동 통치 없이 상속, 전임자 사망 후 현존 귀족들의 추대 등 다양한 경로로 즉위할 수 있었다. 물론 무력 행사로 권력을 잡아 성공하는 경우도 있었다. 마지막 비시고트 왕들에서도 이런 가능성들을 본다. 검바는 672년 레세스빈토 사후 원정군에 있던 귀족들의 합의로 선출되었고, 에르비그는 680년 궁정 쿠데타로, 에기카는 687년 전임자 에르비그 가문과의 합의(그 딸과 혼인)로, 위티자는 아버지에 의해 공동 통치자로 지명되었다. 대략 매 세대 교체마다 위기가 있었고, 귀족 가문과 그들의 후원 네트워크는 자기 위치를 강화하고 경쟁자를 약화시키려 했다. 이는 왕위와 그에 딸린 자원을 차지하려는 경쟁이자, 그 권력원이 타인 손에 남는 것을 막으려는 투쟁이었다.

이러한 갈등과 그 연속성은 왕국의 구체적인 사회·정치 조직 방식과 직결된다. 토지를 소유하고 경작 농민을 지배하는 귀족 가문들은 왕권에 대한 견제라는 이해관계에서 일치했다. 동시에 자신들이 그 자리를 차지해 자원을 지배하고 추종자들에게 분배하며, 가문 인사들에게 왕국의 고위 직위를 안겨주려 했다.

이런 상황에서 비시고트 역사에서 반란은 빈번했다. 반세기 채 안 되는 이 기간만 해도 693년 직전 에기카를 흔든 쿠데타가 있었고, 이 반란들은 새 왕이 아직 자기 정치 기반을 갖추지 못해 전임자의 인력과 일해야 하는 초기에 더 잦았다. 검바 즉위 첫 해도 그랬고 7세기 내내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이 관행은 로드리고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하는 열쇠다.

700년 무렵의 비시고트 군대

7세기 비시고트 무장과 군사 조직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적다. 로마와 더 가까웠던 옛 체제는 그때까지 유지되지 않은 듯하다. 당대 기록에 나오는 지휘관과 부대는 두스/두케스(dux/duces)라 불리는 몇몇 군지도자가 일정 규모이나 구성이 불명확한 집단을 이끈다고 전한다. 따라서 옛 기본 부대인 티우파(thiufa), 이론상 천 명 규모가 이 시기 비시고트 군사 체제의 근간이었는지는 의문이다.

에르비그 왕 때 제정된 법은 전사들의 무장을 보여준다. 대토지 소유자들은 왕이나 왕정 고관의 소집령이 내리면 원정에 나서야 했다. 그들은 자비로 유지하는 자기 군사 수행원과 일부 종속민으로 부대를 꾸려야 했다. 입법자는 이들을 셋으로 나누었다. 첫째, 군사적으로 가장 정예인 그룹은 사슬갑옷(로리카)이나 일종의 갑옷(자바), 금속이 아닐 수도 있다, 을 갖춰야 했다. 둘째는 방패와 검에 활·화살·투창을, 마지막 셋째는 훨씬 열악하게 투석구와 아마 막대기를 지녔으니 로마 시대 투석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첫 그룹은 기병이었을 공산이 크다. 방어구 투자 자체가 그걸 뒷받침하므로, 명시되진 않았지만 그렇다. 따라서 군대의 일부, 어쩌면 3분의 1은 흉갑과 공격 무기(창 추정)를 갖춘 기병이었고, 다른 부분은 경장비 보병으로 투사 무기 운용이 가능했으며, 더 적은 집단은 전투 외 임무도 맡았을 투석병이었다. 이 군대의 결정적 구성 요소는 중무장 기병이었다.

대토지 소유자만 병력을 내는 게 아니었다. 영토 단위에서도 징집병(레비)이 나왔고, 이들은 주두크나 두스가 이끌었다. 이들의 충원 방식은 알 수 없으나 앞선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궁정 고관들도 자기 무장 병력을 내야 했다. 즉 왕 주변 귀족, 궁정 거물들이다. 이 집단엔 보병보다 기병이 더 많았을 테니 군사적 역량이 더 컸을 것이다. 이들은 대토지 소유자나 여러 고관 같은 각자 지도자 아래 독자적 부대를 이뤘을 것이다.

과달레테 전투

711년 봄 내내 북아프리카 선박들이 해협을 건너 점점 불어나는 병력을 반도로 실어 날랐다. 세우타 세력도 이 작전에 가담했는데, 당연히 로드리고에게 충성하지 않았다. 이 율리아누스의 역할은 후대 아랍 전설이 살을 붙였으며, 해협 양안 총독으로 남아 보상받았다고 한다. 이미 반도 안에서는 어떤 영주도 반응하지 않았다. 성공을 확신 못 해 왕군 도착을 기다렸을 수 있다. 일부 사료는 로드리고가 톨레도에서 북부로 원정 나갔었다고 하나, 이는 늦은 아랍 증언뿐이라 확신할 수 없다. 다만 즉위 첫 해 위신을 세우려 손쉬운 원정을 벌였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어쨌든 사태를 인지한 군왕은 상륙지로 병력을 돌렸다.

이 시기 왕국의 형편을 우리는 매우 부정적으로 보아왔다. 그러나 이 왕국이 대군을 소집해 남진하며 보급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뛰어난 조직 능력과 일정 수준의 기능이 작동했음을 보여준다. 군대는 톨레도에서 코르도바로 이어지는 로마 가도를 따랐고, 로드리고는 거기서 추가 병력과 물자를 기대했을 것이다. 병력 규모는 알 수 없다. 아랍 사료는 자기들 승리를 돋보이게 하려 숫자를 부풀리는 경향이 있다. 673년 검바의 원정 병력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라 보고, 1만 2천~1만 4천 명 사이로 추정한다.

코르도바에서 에히하로, 거기서 카르테야(산 로케)로 가는 해안로를 탔을 것이다. 더 지체하면 추가 상륙과 적 증원으로 불리해지니 합리적 선택이었다. 아랍 사료만이 전투 장소를 비교적 정확히 전하나,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전투는 7월로 추정되며 와디 라카(Wadi Lakka), 즉 '호수의 강'에서 벌어졌는데, 보통 바르바테 강이나 차라리 과달레테 강으로 비정된다. 이는 로드리고의 진군로를 뒷받침하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리스도교 측 연대기인 754년 무명 연대기는 '트란스둑틴 곶들', 즉 알헤시라스 북동쪽 산지(그라살레마 일대)를 지목하는데, 이는 세비야를 거치지 않고 에히하에서 바다로 직행했다는 경로를 지지한다.

배신이 있었나?

모든 사료는 회전(會戰)에서 배신이 일어났음을 한목소리로 전한다. 아랍 전통과 후대 그리스도교 연대기는 위티자 가문의 주도적 역할을 강조한다. 로드리고가 위티자 아들들에게 양익 군단을 맡겼는데, 이들이 무슬림과 내통해 전장을 이탈, 비시고트 군의 진형을 무너뜨리고 궤멸시켰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서술은 신빙성이 낮다. 위티자 자녀들이 군을 이끌 만큼 장성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다른 이유들도 있다. 첫째, 어떤 지휘관도 충성이 의심스러운 자들에게 양익 지휘를 맡기지 않는다. 불과 몇 달 전 위티자파가 실각했는데 그들에게 그런 중책을 주리도 없고, 애초에 소집에서 배제되었을 수도 있다. 둘째, 전장 이탈은 엄청난 혼란을 낳는다. 그 와중에 아무도 안전을 장담 못 하니, 치밀하게 계획된 행동치곤 리스크가 너무 컸다.

가장 오래된 그리스도교 사료가 실마리를 줄 수 있다. 이를 토대로 재구성하면 이렇다. 대규모 비시고트 군대가 베르베르인 주력, 약 1만 명 이상(아랍 측 수치는 1만 2천 정도이나 과장 가능)의 존재를 알았다. 당시 전술은 승리를 확신할 때만 회전을 받아들이라고 했다. 의심이 들면 성벽 도시로 피신해 증원을 기다리는 게 정석이다. 로드리고가 도전을 받아들였다면 승리를 꽤 확신했음을 뜻한다. 적 수가 적어서만이 아니라, 이들이 말이 거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비시고트 군은 상당한 마병을 보유해, 말이 없던 적보다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무슬림이 말을 갖게 된 건 승리 뒤여서, 그걸로 정복을 가속했다.

전투 초반, 비시고트 군 일부가 전장을 떠났다. 이 모의는 회전 직전, 로드리고가 눈치를 챌 틈도 없이 이뤄졌을 공산이 크다. 결정은 엄청난 도박이었고, 754년 연대기는 배신자들까지 포함한 비시고트 군이 전멸했다고 전한다. 과장이지만 피해가 막대했음을 시사한다. 과정이 치밀하게 짜였다면 배신자들은 타리크의 묵인 아래 탈출로를 확보했을 테고, 그런 참사는 없었을 것이다.

배신의 동기는 새 왕에게 여러 귀족 집단이 품은 불신과 관련 깊다. 로드리고는 집권 과정이 얼마나 문제적이었는지 이미 보았듯, 필연적으로 정적이 있었다. 재위 초반 여러 귀족 그룹은 특정 왕을 실각시키고 자기 세력의 권력 지분을 늘리려 했을 수 있다.

위티자파가 후대 전설만큼 결정적 역할을 했을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과달레테 전투 뒤 톨레도 왕국의 해체 과정이 시작됐다. 일부 기록은 아랍과의 충돌뿐 아니라 '내부의 분노(rabia intestina)', 즉 왕국의 대응력을 더욱 갉아먹은 내전을 전한다. 이 와중에 이미 유력하고 부유했던 위티자파 같은 집단이 신정세 하에서 이득을 봤다. 무슬림과 신속히 협약을 맺어 경제·사회적 기득권을 지키고 가문 후예들이 요직을 이어갔다. 한 세대 뒤 정복의 상대적 수혜자로 비치자, 정작 당대 사료가 지목하지 않았던 침략의 책임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왕위를 칭하며 동북쪽 사분면에 잔존하던 비시고트 세력도 정복의 물결에 사라졌다. 무슬림 군은 에히하에서 비시고트를 다시 격파하고 톨레도로 진격했는데, 항복한 듯하다. 한편 부하의 승전 보고를 받은 무사가 712년 대군을 이끌고 상륙했다. 714년경 사라고사, 719년 새 총독 알삼이 피레네 너머 고트 속주 수도 나르본을 점령했다. 더 이상의 큰 야전 전투 기록은 없고, 우리 증거는 일부 도시 강습과 주로 협정 뒤 항복으로 정복이 이뤄졌음을 가리킨다.

군사적으로 승리는 정복자들의 작전 속도와 큰 관련이 있다. 결정적 전투 시점의 비시고트 왕권 동요가 과달레테 패배의 직접적 원인이다. 하지만 이 동요는, 유력 귀족 가문들이 권력과 부를 더 차지하려고 치열하게 다투던 사회에서 권력을 어떻게 이해했는지와 직결된다.

전설의 곁가지들

역사가들은 이 사건들에 여러 이야기를 덧입혔다. 그중 하나가 비시고트 병력 수를 부풀린 것으로, 어떤 기록에선 10만 명에 이르는데 절대 불가능한 수치다. 아랍 측에서 패전자 수를 늘려 정복자의 영광을 키우려 했음은 분명하다.

일부 역사가들은 정복을 미화하려고 여러 전통의 이야기 조각들을 끌어왔다. 무슬림 도래와 비시고트 멸망을 예언했다는 예언담도 있고, 침략 시점과 얽힌 이야기도 있다. 아랍 역사가들은 로드리고가 금마차를 타고 전장에 왔다고 전한다. 로마 황제의 의식용 행차 전통과 관련되나, 비상시에 험한 지형을 금마차로 이동했을 리 없다. 나중에 진흙탕 강가에서 왕의 부츠가 발견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왕이 전투 중 실종된 사실과 연결되며, 왕국의 전설적 부를 강조하려는 의도다. 이 부는 비시고트 왕실 보물과 그 노획담을 통해서도 부각된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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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anzano, E. (2006): Conquistadores, emires y califas. Los Omeyas y la formación de al-Ándalus, Barcelona, Crítica.
  • Sánchez Albornoz, C. (1973): Orígenes de la nación española, Oviedo, Instituto de Estudios Asturianos, vol. I.

이 글은 Desperta Ferro Antigua y Medieval nº 6에 게재되었으며, 차기 호 Desperta Ferro Antigua y Medieval nº 7: al-Ándalus, de la conquista a la quiebra del Califato의 예고편으로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