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하르코프의 서곡: 바르벤코보-로조바야 공세

1942년 1월 중순, 스타브카(소련 최고사령부)는 레닌그라드에서 흑해에 이르는 전 전선에 걸쳐 총공세를 개시할 것을 명령했다. 이 야심찬 전략의 일환으로, 남부 및 남서부 전선을 지휘하던 붉은 군대 남서방면군 사령부는 하이레스그루페 쥐트(남부집단군)의 병력을 하르코프와 돈바스 전략 지역에서 격멸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그러나 이 작전은 원래의 목표와 달리, 이 두 도시를 점령한 것이 최대 진격점이었기 때문에 바르벤코보-로조바야 공세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배경: 남부 전선의 반격

스타브카가 1월 중순 러시아 남부에서 대공세를 감행할 이유는 충분했다. 1941년 11월 말, 독일군이 모스크바에서 멈추기 3주 전, 남부 전선 군단은 로스토프를 점령한 제1기 판처아르메를 즉시 공격했다. 독일군이 승리를 이용해 캅카스 남진을 개시하기 전에 이를 저지하여, 로스토프를 포기하고 미우스 강 서쪽의 새로운 방어선으로 후퇴하게 만들었고, 12월 초 전선이 안정되었다. 여전히 돈바스 탄전 지대를 장악한 하이레스그루페 쥐트는 봄에 로스토프 재진격을 계획하고 크림 반도 세바스토폴의 소련군을 포위했다. 그러나 모스크바에서의 소련의 승리가 독일의 계획을 갑작스럽게 뒤흔들었다.

바르벤코보-로조바야 공세 (1월 18일~31일)

작전 계획

1941년 12월 19일, 남서방면군 총사령관 S. K. 티모셴코 원수는 스타브카에 하이레스그루페 쥐트를 격파하고 드네프르 강을 도하하는 계획을 승인해달라고 요청했으나, 돈바스의 독일군 격멸과 하르코프 점령이라는 덜 야심찬 목표만 승인받았다.

제1 단계(7~8일)에는 남부 전선의 제57군과 제37군이 주공으로, 이줌에서 슬라뱐스크 남쪽까지 도네츠 강을 따라 제17 아르메의 방어진을 공격한 후 서쪽으로 75~80km 진격해 로조바야와 바르벤코보를 점령할 예정이었다. 동시에 제12군이 제17 아르메 우익을 상대로 보조 공격을 가해 아르툐몹스크를 점령한다.

제2 단계(15~16일)에는 제5, 제1 기병군단이 선도하여 두 군이 파블로그라드로 진격한 후 남쪽으로 선회, 제17 아르메와 제1기 판처아르메의 후방으로 진입해 통신을 차단하고 아조프해 북쪽 해안에 도달한 뒤, 제12, 18, 56군과 협력해 양측을 포위 섬멸한다. 병행해 제57, 37군 주력은 드네프로페트롭스크와 자포리자 사이 드네프르 강을 도하하며, 제9 예비군이 필요시 주공 그룹을 증원한다.

동시에 남서전선의 제38, 6군도 도네츠 강을 넘어 서진한다. 제38군은 하르키우 북쪽과 남쪽의 제6 아르메 방어를, 제6군은 이줌 북쪽의 제17 아르메 방어를 공격해 15~35km 진격, 추구예프, 즈미예프, 알렉세예프스코예를 점령한다(7~8일). 이후 제6 기병군단이 선도하여 양군이 집게 움직임으로 제6 아르메를 포위 격멸하고 하르코프를 해방하며, 남부 전선의 우익을 엄호한다.

독일측 방어 태세

벨고로드~하르키우 구간과 남쪽 도네츠·미우스 강을 따라 타간로그(아조프해)까지, 하이레스그루페 쥐트는 제6, 17 아르메와 제1기 판처아르메를 배치했다. 제1기 판처아르메에는 이탈리아 원정군(3개 사단), 슬로바키아 경기계화사단, 제13·14·16 판처 사단, 제60 기계화사단, SS 비킹 및 SS 라이프슈탄다르테 아돌프 히틀러(LAH)가 제3·14 기계화군단 예하에 편성되어 있었다. 이들 기동 부대는 미우스 강선 방어 중이거나, 11~12월 로스토프 전투의 여파로 휴식·재정비 중이었다.

하이레스그루페 쥐트의 방어선은 너무나 허술했다. 미우스 강선과 하르키우 주변은 견고했으나, 병력 부족으로 발라클레야에서 슬라뱐스크 남쪽까지 도네츠 강을 지키는 제298, 68, 257, 295 보병사단과, 하르키우 북동쪽의 제294 보병사단(제6 아르메 예하)은 25~30km의 전선을 담당했다. 이는 1941년의 2배 이상으로, 소련이 주공 공격 구역을 선정할 때 고려한 약점이었다.

병력 비교

소련 자료에 따르면 제6, 38, 57, 37, 12, 9군은 도합 361,690명(최전선 병력 204,000명)으로, 보병에서 "1.5~2:1 우세", 기병에서 절대적 우세, 전차·항공기·포병에서 상당한 우세를 점했다(최근 기밀 해제 자료에 따르면 제6, 57, 37, 12군만 147,500명). 즉, 독일 사단 1개당 소련 보병·기병 사단 4~6개와 전차여단 2~3개가 맞선 셈이다.

설상가상으로 공세 전야 하이레스그루페 쥐트의 지휘 체계는 혼란에 빠졌다. 1월 16일, 사령관 발터 폰 라이헤나우 원수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히틀러는 중순 하이레스그루페 미테 사령관직에서 사임하고 요양 중이던 페도르 폰 보크에게 지휘를 맡겼다. 보크는 19일 폴타바 사령부에 도착했고, 제17 아르메 임시 사령관 헤르만 호트 대장으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전날 붉은 군대가 이줌 북남쪽에서 제17 아르메 방어를 돌파해 후방으로 무제한 진격 중이라는 것이다. 예비대가 전무하고 서쪽 증원군이 도착하려면 수 주가 걸리는 상황, 더 나쁜 소식은 없었다.

돌파: 1월 18~21일

악천후로 지연되었으나, 공세는 1월 18일 05:00에 남서전선 제38·6군과 남부 전선 제57·37·12군이 동시 공격으로 개시되었다. 일부 구역에서 눈부신 전과를 올렸으나 다른 구역에서는 전혀 진격하지 못했다.

이줌 북쪽에서 제337, 411, 393 소총사단이 제298 보병사단을 압도했다(우익은 이줌에서 제270 소총사단에 포위 중). 얼어붙은 도네츠 강을 넘어 서쪽으로 4일간 10~28km 진격, 제6 기병군단 투입에 필요한 교두보를 확보했다. 방어진지의 수많은 거점에 갇힌 방어군은 서쪽으로 후퇴하거나 전멸했다. 그러나 제6군 우익에서는 발라클레야 요새의 제44 보병사단 완강한 저항과 독일 공습으로 제253 소총사단이 1km 진격에 그치며 32명 전사, 161명 부상의 손실만 입었고, 제38군 구역(하르키우 동쪽, 제297·294 보병사단)에서도 완전 실패했다.

이줌 남쪽의 제57군 공격도 제6군 북쪽과 유사했다. 제341, 351, 255 소총사단이 제68 보병사단과 제257 보병사단 좌익을 격파해 서쪽으로 최대 14마일(약 22.5km) 진격했으나, 좌익의 제335, 333 사단은 슬라뱐스크 북쪽 제257 사단 요소와 격전 끝에 2~7마일(3~11km) 진격에 그쳤다.

더 남쪽, 제37군(제96, 99, 230 소총사단, 전차 92대 2개 여단, 기병사단 1개)은 슬라뱐스크 동쪽 제295, 76 보병사단을 공격했으나 4일간 10~20km 진격 후 수많은 요새화 진지에 막혔다. 제12군(제176, 15, 4 소총사단, 제71 NKVD 소총여단)도 제르진스크 동쪽 제9 보병사단, 제97·101 예거 사단 방어를 뚫지 못했다.

하르코프의 서곡: 바르벤코보-로조바야 공세
공세 초기 돌파 상황도

영하 -25℃, 45~60cm 적설에도 불구하고 21일 늦게 제6, 57군이 제6, 17 아르메 사이 70km 폭, 30km 깊이의 돌파구를 여는 데 성공했다. 독일군에게는 간격을 막을 예비대가 없었다. 위안이라면 발라클레야와 슬라뱐스크 저항 거점을 유지하며 급히 증원해 소련 돌출부를 저지하려 했다는 점뿐이었다.

확대 작전: 1월 22~31일

티모셴코는 1월 22일 확대 단계에 돌입, 3개 기병군단을 투입했다. 22~24일 제411, 393, 270 소총사단이 서쪽으로 약 30km 진격했다. 제6 기병군단 3개 사단이 23일 제411 사단을 통과, 24일 새벽 하르코프-로조바야 철도선을 차단, 당일 알렉세예프스코예에서 프리드리히 집단과 이틀간 격전 끝에 점령했다. 제6군 우익 제253, 337 사단은 발라클레야 주변에서 소모전을 지속했다.

남쪽 제57군 전선은 58km에서 114km로 늘었다. 제341, 351 사단이 서·남서로 26km 진격했으나, 제255, 349 사단은 슬라뱴스크 서쪽에서 재편성된 신선한 독일군에 막혀 진격이 미미했다. 좌익 제335, 333 사단은 슬라뱐스크 요새화 진지 격멸에 헛수고했다. 결과적으로 제57군은 확대 단계에서 병력 밀도가 현저히 저하되었다.

24일 티모셴코는 제5 기병군단을 바르벤코보 남쪽에 집결시키고 제1 기병군단을 그 동쪽에 배치하라고 명령했다. 같은 날 늦게 제9군을 크라스니 리만 지역에 집결, 슬라뱐스크 북쪽에서 공격할 준비를 명했다.

한편 독일군은 도네츠 강 서쪽에서 소련의 추가 진격을 차단할 전선 복구에 총력을 기울였다. 제6 아르메가 발라클레야의 레온하르트 집단을 증원, 프리드리히 집단이 하르코프 남쪽 베레카 지역을 요새화해 제6 기병군단을 차단, 렌츠 집단이 로조바야에서 제298 보병사단 잔여 병력을 수습, 루마니아 치안 부대가 드네프로페트롭스크 접근로를 방어했다. 가장 중요하게는 제17 아르메 좌익과 제1기 판처아르메에서 끊임없는 증원이 슬라뱐스크 안팎의 방어선 보강을 위해 북상했다.

티모셴코가 기병으로 슬라뱐스크를 서쪽에서 포위하려 함을 간파한 하이레스그루페 쥐트는 제97, 100 예거 사단에 크라마토르스크·콘스탄티노프카 서쪽 방어를 맡겨 이 진격을 차단토록 했다. 이 두 세력 간 경쟁이 슬라뱐스크 운명을 결정지을 것이었다. 1월 26일, 보크 원수는 독일이 이 경쟁에서 이기도록 제17 아르메와 제1기 판처아르메를 통합, 후자의 사령관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원수에게 지휘를 맡겼다. 클라이스트는 티모셴코의 야심찬 포위 계획을 좌절시킬 전력을 신속히 마련했다.

기동은 26일 세 기병군단에 발라클레야·슬라뱐스크 포위 점령 명령으로 시작됐다. 제6 군단은 베레카를 통해 북진 후 동쪽으로 선회, 하르코프-발라클레야 간 독일 통신선을 차단한다. 발라클레야는 제253, 337 사단에 제343 사단이 증원돼 점령한다. 제411, 393, 270 사단은 확대 작전을 계속한다. 이들이 하르코프-로조바야 철도선을 넘어 추가 20~30km 서진, 제270 사단이 로조바야를 점령했으나, 발라클레야 공격은 실패했고 제6 기병군단 진격도 중단됐다. 4일간 1,162명 손실과 734필 말 손실, 프리드리히 집단의 완강한 저항과 36시간 폭설로 도로가 마비되며 베레카 직전에서 전진이 멈췄다.

발라클레야-추구예프 공세 (3월 7~25일)

1월 공세 실패 후 티모셴코는 단계적으로 목표 달성을 모색했다. 더 강력한 슬라뱐스크 대신 발라클레야 요새를 먼저 제거하고, 스타리 살토프에서 도네츠 강 교두보를 확보한 뒤, 양 교두보에서 확대 작전을 펼쳐 봄에 제6 아르메를 격멸하려 했다. 2월 27일, 남서전선 제38, 6군에 3월 7일 공세 개시를 명령했다. 추구예프·발라클레야 독일군 포위 격멸, 하르코프 북동쪽 도네츠 강 서안 교두보 확보, 가능하면 하르코프 점령이 목표였다.

제6군 주공

제6군이 주공을 맡아 바르벤코보-로조바야 교두보 북쪽 20km 구간에서 제343, 253, 337, 411 소총사단과 제13, 133, 5 근위 전차여단(4개 소총사단, 3개 전차여단)으로 공격한다. 임무는 발라클레야 서쪽 도네츠 강 남안 제44 보병사단 방어를 돌파, 강을 건너 북진해 추구예프를 점령하고 북동쪽에서 진격해올 부대와 합류하는 것이다. 예비대로 제47 소총사단, 제100 독립 스키대대, 제28 기병사단을 둔다. 제411 사단 좌측에서 제393, 270 사단이 로조바야 남쪽 구역을 방어하며, 남동쪽에서 제6, 1, 2, 5 기병군단이 독일군을 견제한다.

제38군 보조 공격

제38군은 도네츠 강을 넘어 서쪽 공격한다. 제1 근위 소총사단, 제227, 226, 124 소총사단으로 주공 충격집단을 구성, 제81 소총사단과 제10 전차여단을 예비로 둔다. 제294 보병사단 도네츠 강 방어를 돌파, 서안에 교두보를 확보하고 하르코프 중간 지점까지 남서진, 추구예프 지역을 점령한 뒤 제6군과 합류해 하르코프를 공격한다. 우익은 기계화 소총여단이 서진해 오보얀-벨고로드 도로를 차단하며 엄호한다.

공세 전개

제6군 공격

제6군 공격은 3월 7일 05:00, 알렉세예프스코예에서 발라클레야 서쪽 10km까지 33km 전선에서 개시됐다. 제343 사단이 2km 진격해 노비 체르카스키 요새 점령, 제253 사단이 체르보니 도네츠(강 남안 요새) 인근 도달, 제337 사단과 제133 전차여단이 4~5km 진격해 표트르스크 요새 점령, 체르보니 슐라이·멜로바야 요새 인근 도달했으나 제47 사단 증원에도 불구하고 점령 실패. 좌측 제411 사단과 제5 근위 전차여단 보조 공격은 베레카에서 프리드리히 집단 방어에 막혔으나, 1개 연대가 좌익을 우회해 볼쇼이 비시킨 요새 인근 도달. 3월 9일 자정까지 제44 보병사단 도네츠 강 연안 방어 진지가 건재했다.

교착 타개를 위해 3월 10일 랴비셰프 장군이 제47 사단을 제343 사단의 림란 남쪽 도하점 공격에 투입, 11일 제28 기병사단과 제100 스키대대로 제47, 343 사단의 프리드리히 집단 좌익 포위 기동을 지원했다. 11~12일 6km 진격했으나 체르카스키 비시킨에서 림란 남쪽 도하점을 지키는 제44 보병사단 요소에 막혔다. 13일 체르보니 도네츠 교두보의 독일 반격 격퇴, 14일 제411, 343 사단에 체르카스키 비시킨의 제44 사단 요새와 볼쇼이 비시킨의 프리드리히 집단 방어를 동시 공격 명령, 제28 기병사단과 제100 스키대대가 두 진지 사이 틈새로 진입해 하르코프와의 통신 차단 시도. 기병·스키 부대가 15/16일 밤 15km 독일 후방 진입했으나 차단 부대와 지형에 막혀 25일 랴비셰프의 중지 명령(28일 실행)까지 더 이상 개입 못 함. 이로써 제6군 공세 종료.

하르코프의 서곡: 바르벤코보-로조바야 공세
3월 공세 전개도

제38군 공격

하르코프 북쪽 제38군도 7일 05:00 공격 개시, 즉각 강력한 저항 직면. 우익 제1 근위, 제227 사단이 스타리차 남외곽 점령, 바르바리브카·루베즈노예 외곽 도달, 당일 말 7×7km 교두보 확보. 제226 사단은 2개 연대 미도착으로 1개 연대만 선제 공격, 주간 정면 공격에도 1개 대대가 서안에 소교두보 확보. 그러나 제226, 124 사단이 동안의 독일 소교두보 2곳을 제거 못 해 9일 늦게까지 잔존, 지휘관들이 진격 재독려 시까지 머물렀다. 독일군은 이 틈을 타 루베즈노예, 베르흐니 살토프, 스타리 살토프 수비대 증원. 좌익 제300 사단이 볼샤야 바브카·페샤노예 접근, 북쪽 베르흐니 살토프 외곽에 제2 교두보 확보.

7일 말 모스칼렌코 장군이 스타리 살토프를 남북 집게로 점령 명령. 8~11일 제1 근위, 제227, 226 사단과 새로 도착한 제10 전차여단이 루베즈노예 점령 후 남진, 스타리 살토프를 북·서에서 포위. 동시에 제124 사단(9일 강 도하 완료)이 볼샤야 바브카 봉쇄, 남쪽에서 스타리 살토프 공격. 12일 점령 성공, 신규 도착 제3 판처 사단 선봉의 점점 강력해지는 반격에도 불구하고. 이때 제124 사단이 볼샤야 바브카 최종 점령, 제294 사단 연대에 상당한 타격 입힘 보고.

스타리 살토프 함락 후 모스칼렌코군은 확대 시도했으나 실패. 페샤노예 방향 서진 중 13일 제3 판처 사단과 제294 보병사단이 테르노바야-네포크리타야-자로즈노예 축선으로 신규 방어선 구축, 제38군 공세 중단.

교두보 전투는 3월 14~25일 지속. 이 기간 남서전선은 제38군에 14일 제34 기계화 소총여단, 15~16일 제169 소총사단·제6 근위 전차여단, 25일 제3 근위 기병군단 3개 사단 전체, 31일 제13 근위 소총사단, 제5 근위 포병연대, 제4 근위 박격포연대, 전투기 2개 연대 항공전력 증원. 독일 측 파울루스가 제3 판처 사단 전력, 제168 보병사단 제429 연대 전체, 제299 보병사단 제230 연대 전투단, 제79·62 보병사단 소속 대대들로 방어군 증원. 제6 아르메가 스타리 살토프 탈환이나 교두보 제거엔 실패했으나, 월말 스타리차, 바르바리브카, 바이락, 쿠페바야, 볼샤야 바브카를 되찾았다. 모스칼렌코군엔 폭 34km, 깊이 5~8km의 서안 교두보가 남았다. 깊이는 얕지만 5월 중순 공세에 2개 군 투입 공간은 확보했다.

평가와 역사적 의의

1월 공세와 마찬가지로 3월 공세도 실패였다. 소련은 제6군 공격을 전쟁사에서 단순히 삭제했고, 제38군도 흐루쇼프 시기 글라스노스트 시대 서적에 5월 하르코프 공세에 필요한 도네츠 강 서안 교두보 확보 성과로만 잠깐 언급될 뿐이었다. 이마저도 1980년대 말 러시아 역사가들이 5월 하르코프 전투를 재조명하기 전까지 망각되었다.

3월 공세의 역사적 망각은 그 치열함과 좌절을 익명 속에 가뒀다. 러시아가 손실 수치를 기밀 해제하지 않았으나, 1월 공세 손실(4만 명 이상, 전사 1.1만 명)의 약 절반 수준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회고컨대, 1942년 겨울 티모셴코 남서방면군의 두 공세는 5월의 참패가 우연이 아님을, 5월 공세와 함께 스탈린이 모스크바에서 하이레스그루페 미테에 안긴 패배를 남부 러시아에서 하이레스그루페 쥐트 상대로 재현하려던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다. 스탈린과 티모셴코가 1월의 제한적 성과를 3월과 5월에 활용하려 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놀라운 점은 붉은 군대가 1월과 3월의 명확한 교훈을 5월에 활용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참고 문헌

  • Bock, F. von (1996): The War Diary, 1939-1945, Atglen, PA: Schiffer Military History.
  • Moskalenko, K. S. (1967): Na iugo-zapadnom napralevnii [남서방향으로], Vol. 1. Moskvá: Nauka.
  • Savynyi, M. (1943): Barvenkovo-Lozovaia operatsiia (18-31 ianvaria 1942 g.). Kratkii operativno-takticheskii ocherk [바르벤코보-로조바야 작전(1942년 1월 18~31일). 간략한 작전·전술적 개요]. Moskvá: Voenizdat. 붉은 군대 총참모부 작성, 비밀 문서.

본 기사는 데스페르타 페로 콘템포라네아 제16호에 게재되었으며, 차기호인 데스페르타 페로 콘템포라네아 제17호: 1942년 제2차 하르코프 전투의 예고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