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3년 파리 출생 ~ 1461년 메훈쉬르예브르(베리)에서 몰직. 1422년부터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와 바이에른의 이자보 사이에서 태어난 다섯째 아들로, 처음에는 퐁티외 백작 작위를 지녔다. 형제 중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던 장 드 프랑스가 죽자(1416) 투렌 공작 겸 베리 공작이자 프랑스 왕태자가 되었고, 1418년에는 스스로 왕국 섭정임을 선포했다. 그러나 그의 정통성은 부르고뉴파의 도전에 직면했다. 왕비 이자보를 좌지우지하던 부르고뉴파는 1420년 트루아 조약 체결 과정에서 왕비를 통해 샤를의 상속권을 박탈하고 잉글랜드의 헨리 5세에게 넘기는 데 성공했다.
루아르 강 방어선과 잔 다르크의 기적
1422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명목상 국왕이 되었을 때, 잉글랜드군과 동맹인 부르고뉴파는 루아르 강 이북의 거의 전역과 기론드 지방의 귀옌, 이른바 '잉글랜드령 귀옌'을 점령하고 있었다. 아르마냐크파가 장악한 프랑스 남부는 샤를 7세를 국왕으로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그를 '왕태자'라 불렀다. 랑그도크가 주권자를 위해 기울인 재정적 지원은 칭찬할 만했지만, 안정된 재정과 확고한 제도에 기반한 진정한 왕립군의 부재를 만회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샤를 7세 자신도 운명을 믿지 못한 듯했는데, 어쩌면 적들이 덧씌운 사생아 의혹에 마음이 눌려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군대가 치른 주요 전투는 모두 참패였다 — 크라방(1423), 베르뇌유(1424), 청어 전투(1429년 2월).
루아르 강 방어선이 전쟁의 쟁점이 되었고, 오를레앙은 베드포드 공작의 군대에게 포위당했다. 샤를은 참모들과 상의 끝에 포위 돌파는 불가능하며 남쪽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바로 그때 잔 다르크의 기적이 일어났다. 오를레앙은 구원되었고, 자르조, 멩의 교량, 보장시가 차례로 탈환되었다. 샹파뉴로 통하는 길이 열렸고, 왕태자는 1429년 7월 랭스에서 대관식을 올렸다. 성녀의 개인적 영향력과 신성한 도유식은 소심한 왕위 요구자를 출생과 왕의 사명, 권위와 신민의 복종을 확신하는 적극적인 군주로 변모시켰다. 샹파뉴와 파리 주변에서 신민들은 하나둘 19명의 카페 왕조 국왕의 계승자 곁으로 귀순했다.
영토 수복과 군제·재정 개혁
왕국의 구원은 눈앞에 있었지만, 완전한 회복은 장기적인 과제였다. 샤를 7세가 '승리왕'이라는 별명을 얻기 위해서는 1433년 불길한 라 트레무아유를 대신해 리셰몽 대장정이 국정의 고삐를 쥐어야 했다. 그 뒤를 이은 몇 해는 여전히 애도(잔 다르크의 처형, 약탈자들의 유린)와 굴욕(선량공 필리프와의 아라스 조약)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 시기에 영토 해방이 준비되고 있었다. 1436년 리셰몽이 파리를 탈환했고, 1450년 포르미니 전투는 잉글랜드군을 노르망디에서 몰아냈다. 1453년 백년전쟁의 마지막 대규모 전투인 카스티용 전투의 승리는 보르도를 포함한 귀옌을 확정적으로 되돌려주었다. 잉글랜드가 손에 쥔 땅은 칼레뿐이었다.
승리는 막대한 인적 역량을 요구했을 뿐 아니라 군대 징병 제도와 국고 운영의 심층적 재편을 필요로 했다. 샤를 7세 치세에 프랑스는 처음으로 고정적이고 항구적인 상비군과 재정 자원을 갖추게 되었다. 1444~1448년의 휴전은 근무 기병대(companies d'ordonnance, 1445)와 프랑 아르셰(francs-archers, 1448)의 창설을 가능하게 했다. 1438년에는 부르주 국사조칭(Pragmatic Sanction of Bourges)을 반포했다. 1440년에는 왕태자 루이가 앞장선 귀족들의 반란인 '프라고리(La Praguerie)'에 직면해야 했다. 반란은 진압되고 가담한 주요 영주들이 복종했지만, 왕태자는 평생 아버지에게 적대적이었다. 알랑송 공작 장 2세가 배적죄로 귀족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것(1458), 근친상간 행위와 영지 내 주권 행사 시도로 의회에 회부된 아르마냐크 백작 장 5세에 대한 소추(1460) 등 아버지가 거둔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년은 왕태자의 음침한 그림자에 가려졌다.
평가: 배은망덕인가, 현실적 군주인가
매력 없는 용모를 지닌 이 왕의 인격은 오늘날에도 파악하기 어렵다. 그의 지성과 도덕성에 대한 평가는 오랫동안 과도하게 엄격했고, 지난 세기까지도 그의 무기력(abulia)과 '왕실의 배은망덕'을 강조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미묘한 시각이 돌아오고 있다.
아버지처럼 — 다행히 아버지만큼은 아니지만 — 샤를 7세 역시 신경이 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1422년 라로셸에서 평의회가 열리던 홀의 바닥이 무너진 일이 있었는데, 샤를은 다치지는 않았어도 큰 충격을 받았다. 이 사건이 잔 다르크의 활약과 대관식 이후 줄어들긴 했지만 사라지지 않았던 무반응이나 육체적·정신적 방기를 설명해 줄 수 있다.
샤를 7세가 '잘 보필받은 자'였기에 '승리왕'이 될 수 있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잔 다르크, 아라곤의 욜랑드, 자크 쾨르, 뒤누아, 상트레유 등 많은 이들(그리고 어쩌면 아녜스 소렐도)이 그의 성공의 설계자였다. 그러나 하인들만 보고 주인을 잊는 것은 경솔한 일이다. 원하고 능력 있는 자만이 보필받을 수 있다. 샤를 7세는 왕국의 일을 자기 뜻대로 처리할 작정이었다. 로마에서 결코 승인받지 못했으면서도 파문으로 이어지지 않은 부르주 국사조칭 사례가 이를 증명하며, 1448년 교회 대분열이 재연될 위기에 처했을 때 프랑스 국왕이 확보한 기독교 세계 중재자의 지위는 더욱 두드러진 증거다.
배은망덕이라는 비난은 언뜻 타당해 보일 수 있다. 이는 두 가지 근거에 기반한다. 포로 수감 중이던 잔 다르크의 구출을 외면한 것(혹은 그렇게 추정되는 일), 그리고 자크 쾨르 사건이다. 잔에 관한 한 왕을 변호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몇 가지 질문만 던지면 충분하다. 부르고뉴인과 잉글랜드인 사이에서 법을 집행하는 이가 샤를 7세였는가? 카페 왕조의 부흥을 막겠다고 단죄를 맹세한 잉글랜드로부터 '소위 프랑스 국왕'이 어떻게 포로의 석방을 이끌어낼 수 있었겠는가? 마지막으로, 노르망디에서 잉글랜드 점령이 종식된 뒤 잔 다르크의 명예회복 재판을 주도한 이가 샤를 7세가 아니고 누구인가? 반면 자크 쾨르에 대해 제기된 부당한 소송에서 왕의 태도는 훨씬 불분명하다. 이 경우 왕은 충신을 시기하는 자들의 공격으로부터 그를 보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왕이 사태를 방관했다 해도, 그것은 최초의 채권자의 보물을 탈취하려던 것도, 재산을 궁정 신하들에게 넘기려던 것도 아니었다. 가장 그럴듯한 설명은 왕태자의 배신 이후 왕의 신변 불신이 병적인 수준까지 커져 있었다는 것이다.
혼인과 자녀
샤를은 1422년 시칠리아 왕 루이의 딸 마리 드 앙주와 결혼하여 열두 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다수는 어린 나이에 요절했다. 살아남은 자들은 다음과 같다. 아버지를 이어 루이 11세가 된 루이, 기옌·베리·노르망디 공작 샤를(1472년 사망), 1444년 미혼으로 요절한 라데공드, 1439년 용맹공 샤를과 결혼한 카트린, 1452년 사부아 공작 아메데 9세와 결혼한 욜랑드, 1447년 부르봉의 장과 결혼한 잔, 1461년 비아나 공 가스통 드 푸아와 결혼한 마들렌.
1433년부터 왕의 정부가 된 아녜스 소렐은 세 딸을 낳았다. 1462년 몰레브리에 백작 자크 드 브레제와 결혼한 샤를로트(1476년 간통을 이유로 남편에게 살해당함), 올리비에 드 코에티비와 결혼한 마르그리트, 그리고 앙투안 드 뷔에이와 결혼한 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