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은 겉모습에 불과했다
하이퐁 사건 이후 잠잠해진 듯했던 평온은 사실 겉모습에 지나지 않았다. 공격은 밤마다 이어졌고, 매일 밤 거곳곳에 바리케이드가 세워졌다. 인도차이나 주민 상당수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면 명령에 따라, 텅 빈 것처럼 보이는 하노이를 떠났다. 모든 징후는 하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곧 전면 봉기가 준비되고 있다는 것.
본국의 침묵, 놓쳐버린 해결의 실마리
프랑스와 베트남 당국 간의 외교 문서 교환과 회담은 어떤 유효한 해결책도 가져오지 못했다. 더 큰 문제는 본국에 있었다. 프랑스에서 새로운 정치적 위기가 정부 기능을 마비시켰고, 현지의 우리는 아무런 지침도 지시도 받지 못한 채 방치되었다. 우리가 상황의 심각성을 몇 번이고 강조해 왔음에도, 본국은 또다시 이 문제에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했다.
12월 12일, 레옹 블룸이 마침내 집권에 복귀했다. 15일, 호치민은 그에게 긴급 메시지를 발신했다. 그러나 이 메시지는 사이공에서 "전송 지연"을 이유로 묶여 있다가, 26일에야 비로소 새 프랑스 정부 수반의 손에 들어갔다. 결정적인 열하루가 그렇게 흘러가 버렸다.
1946년 12월 19일, 저녁 8시 4분
12월 19일, 발전소가 폭파되었다. 그리고 정확히 저녁 8시 4분, 베트남은 공격을 개시했다. 이는 21개월 전 일본군에게서 배운 교훈을 한 글자도 어김없이 재현한 작전이었다. 이 순간부터 1954년까지 프랑스와 베트남을 오랫동안 대립시키게 될 인도차이나 전쟁은, 돌이킬 수 없는 국면에 접어들었다.
포위된 하노이, 그리고 내가 직접 겪은 공격
프랑스군은 다행히 미리 경보를 받고 포위망을 조금씩 뚫어나갔다. 그러나 상황은 극도로 위험했다. 프랑스인들은 인질로 잡혔고, 어떤 사람들은 잔혹하게 학살당했다. 여러 날 동안 하노이는 포위 상태와 공포의 분위기에 잠겼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나는 장갑차에 올라타 모리에르(Morlière) 장군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성채로 향했다. 그러던 중 대구경 지뢰가 차량을 산산조각 내버렸고, 차량은 즉시 수류탄 공격에 휩쓸렸다. 승무원 전원이 중상을 입었고, 운전병은 총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나 자신도 크게 다쳤다. 1946년은 사방에서 전투가 격렬하게 벌어지는 가운데 저물었다.
승리의 환상, 그러나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프랑스군은 하노이를 다시 장악했고, 르클레르(Leclerc)와 마리우스 무테(Marius Moutet)가 나와 합류하기 위해 하노이에 도착했다. 베트남군은 삼각주 지대에서 빠르게 밀려났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은 잠시에 불과한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 분명하게 시작된 것은 프랑코-베트남 전쟁, 즉 그때까지 온전히 남아 있던 수많은 가능성을 짓밟아 버린, 잔혹하고도 무익한 전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