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초, 이탈리아 전선의 병사들에게는 이례적인 연설이 내려졌습니다. 프랑스 원정군(FEC)을 지휘하던 알폰스 쥐앙(Alphonse Juin) 장군은 몬테카시노 전투를 앞두고 부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만약 그들이 이 전투에서 승리한다면, 50시간 동안 그들은 적진 너머에서 발견한 모든 것의 절대적인 소유자가 될 것입니다. 누구도 그들이 행한 일에 대해 처벌하지 않을 것이며, 누구도 그들에게 행한 일에 대해 설명을 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병사들은 그 약속대로 행동했습니다.
200km의 진격: 구스타프 라인과 몬테카시노
이탈리아 남부와 나폴리 기지에 상륙한 연합군의 목표는 로마에 도달해 해방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거리는 200km가 조금 넘었지만, 1943년 겨울의 혹독한 기상 조건과 연속적인 방어선에 기반한 독일군의 효과적인 저항으로 진격은 좌초되었습니다. 이러한 수비선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소위 구스타프 라인으로, 수도에서 약 10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그 주축은 카시노(Cassino) 마을과 무엇보다 몬테카시노 수도원이었습니다. 해발 1,100m 언덕 위에 우뚝 선 이 수도원은 로마로 통하는 길을 방어하는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연합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수도원 폐허에 자리잡은 독일군을 격파하기 위해서는 무려 4개월(1944년 1월~5월)이 걸렸고, 여러 차례의 공격이 필요했습니다. 여기에는 네팔 출신 산악 전투의 대가 구르카스, 북아프리카 출신 산악전 전문가 구미에르, 그리고 전투곰 보이텍(Voytek Bear)을 포함한 폴란드 육군 제2군단까지 투입되며 특별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프랑스 원정대의 구미에
'구미에르'는 누구인가
구미에르라는 이름은 원래 1900년대 알제리 남부에서 프랑스군과 동맹을 맺고 싸우던 비정규 부족 부대에 붙은 명칭으로, 훗날 프랑스 원정군 소속 모로코 식민지 군대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쥐앙 장군의 저열한 연설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바로 이 구미에르들이었습니다. 실제로 이들이 저지른 짓을 지칭하기 위한 새로운 용어가 만들어질 정도였으니, 바로 마로키나테(Marocchinate)입니다. 몬테카시노 전투 이후 FEC 장교들의 승인 아래 구미에르들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민간인에게 자행한 대규모 강간을 의미합니다.
기록으로 남은 피해: 최소 6만 명의 여성
Associazione Nazionale Vittime delle Marocchinate(국립 마로키나테 피해자 협회) 회장 에밀리아노 치오티(Emiliano Ciotti)는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오늘날 수집된 수많은 문서를 보면 적어도 20,000건의 강간 사건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수치는 현실을 반영하지 못합니다. 당시의 각종 의료 보고서들은 피해 여성 중 3분의 1이 수치심이나 긍지 때문에 범죄 신고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경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칠리아에서 활동을 시작해 피렌체 성문에서 끝난 '프랑스 원정군'이 저지른 만행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마로키나테라는 용어는 몬테카시노 전투 이후 만들어졌지만, 구미에르들은 수많은 마을을 지나갔습니다.] 최소 6만 명의 여성이 강간당했으며, 그중 다수는 여러 차례에 걸쳐 피해를 입었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의료 보고서는 당시 가해의 잔혹성을 뼈아프게 확증합니다. 성폭력으로 인한 항문 및 질 열상, 피해자가 물지 못하도록 부러뜨린 치아, 그리고 아내·어머니·딸을 지키려던 남성들에게 가해진 찔림과 거세까지. 매독, 임질 및 기타 성병이 지역 전역으로 번져, 오직 미국산 페니실린의 사용만이 이 지역을 전염병의 확산으로부터 구했습니다. 에스페리아(Espéria) 교구의 사제 알베르토 테릴리(Alberto Terrilli)는 여성 세 명을 구하려 했다는 이유만으로 고문과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쥐앙 장군은 끝내 자신의 군인들이 저지른 폭력을 규탄하지 않았습니다.
교황의 호소, 360건의 기소, 그리고 60년 만의 사과
1944년 6월 18일, 교황 비오 12세는 샤를 드 골에게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1년 뒤 프랑스 법원은 이탈리아 영토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모로코인 360명을 기소했지만, 이는 빙산의 일각조차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2004년 11월 26일, 모로코 출신 참전 용사 협회 회장 아흐미드 벤라할레이트(Ahmid Benrahhalate)가 몬테카시노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했습니다. 전쟁 종결로부터 60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라 치오시아라〉 스틸컷
'라 치오시아라', 잊히지 않는 기억
1957년 알베르토 모라비아는 소설 라 치오시아라(La ciociara)를 발표했습니다. 두 여인, 체시라(Cesira)와 그녀의 딸 로제타(Rosetta)가 점령지 이탈리아에서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피난처였던 치오차리아가 해방된 직후 딸이 구미에르들에게 잔혹하게 강간당하는 이야기입니다. 1960년 비토리오 데 시카가 이 소설을 영화 La ciociara(스페인 개봉명 〈두 여인〉)로 큰 화면에 옮겼고, 소피아 로렌은 비영어권 영화 출연자 최초로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이 비극을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출처: Gli stupri nelle guerre mondiali – 미켈레 스트라차(Michele Strazza), Associazione Nazionale Vittime delle Marocchina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