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마련된 착륙장
얼쿼트(Urquhart) 소장은 어쩔 수 없이 도시에서 상당히 먼 지역에 강하 장소를 정해야 했다. 아른험 북쪽 약 6킬로미터 지점의 넓은 개활지는 건조하고 숲에 가려져 도시에서 보이지 않았지만, 사구와 덤불이 너무 많이 발달해 대규모 글라이더 부대를 착륙시키기에는 부적합했다. 강 남쪽의 넓은 개활지 역시 기각할 수밖에 없었다. 예상되는 대공포화 때문만이 아니라, 지반은 무르고 수많은 작은 도랑으로 갈라져 있어 글라이더 착륙이나 대부대의 신속한 기동에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이 남쪽 지역은 제3차 강하 단계에서는 활용 가능했다. 다리 주변의 대공포 진지가 무력화된 이후라면 말이다. 얼쿼트는 이곳을 소사보프스키(Sosabowski) 휘하 폴란드 여단에게 배정했다.
첫째 날과 둘째 날에 글라이더 및 낙하산 부대를 받을 나머지 모든 지역은 도시 서쪽에 선정되었다. 그곳의 지형이 원하는 조건을 갖추고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다섯 개 구역, 사흘에 걸친 강하 일정
얼쿼트 장군은 이 지역들을 다섯 개 구역으로 나누었다. 아른험~위트레흐트 철도선 북쪽 징켈 황야(Ginkel Heath)에 세 곳, 남쪽 렌쿰 황야(Renkum Heath)에 두 곳이다. 이 모든 지역에는 제21독립낙하산중대 병력들이 영시간(零時) 두 시간 전에 미리 내려 설치한 색색의 나일론 끈 표식이 세워질 예정이었다.
영시간이 되면 제1낙하산여단과 사단 직할부대를 실은 제1활공여단(글라이더 부대)의 글라이더 대부분이 도착한다. 둘째 날에는 제4낙하산여단과 물자를 실은 나머지 글라이더 부대가, 셋째 날에는 폴란드 여단이 도착하는 일정이었다.
날씨와 적의 반격, 걱정거리는 많았다
폴란드 여단을 지휘하는 소사보프스키 소장은 차마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좋은 날씨가 세 번의 강하 작전이 모두 계획대로 진행될 만큼 오래 지속될까? 그리고 날씨가 악화된다면, 제2군이 예상만큼 빨리 얼쿼트를 구원하지 못하고 독일군의 반응이 즉각적이고 강력하게 나타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나 준비 단계에서 드러난 사실은, 참모부가 이 지역의 적군이 그런 규모의 반응을 보일 능력이 없다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패주하는 수십만 명' — 과도하게 낙관적인 정보 판단
네덜란드 국경에서 대기 중이던 제2군의 선봉, 호록스(Horrocks) 중장의 제30군단 앞에는 보병 6개 대대와 포 25문, 전차 겨우 20대가 있는 것으로 파악되어 있었다. 이 빈약한 방어선 뒤 네이메헌 지역에는 네덜란드 저항조직 요원들이 신체적으로 허약한 병력 6개 대대가 더 있다고 보고했고, 그 너머 아른험 지역에는 재건을 위해 안간힘을 쓰는 흩어진 부대 몇 개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적군의 사기도 병력만큼이나 낮아 보였다.
9월 12일, 제21군집단 정보부의 보고서는 아른험 지역의 병력 존재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은 채, 후퇴 중인 독일군이 무질서하고 사기가 꺾였다고 선언했다. "수십만 명의 병사가 패주하고 있다. 그들 가운데는 — 이제 쓸모없어진 참모부들은 말할 것도 없고 — 전선을 버리고 어디로 가야 할지조차 모르는 궤주(潰走) 부대의 열이 보인다."
6일 뒤에도 같은 정보기관은 9월 10일 몽고메리와의 면담 당시 뎀프시(Dempsey)를 불안하게 했던 정보에도 불구하고 같은 낙관론을 고수했다. 제2군 사령부 역시 광신적인 후위부대의 얇은 벽 뒤에는 네덜란드에 의미 있는 적 전력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9월 15일의 경고, 20일에야 전달되다
그러나 9월 15일 네덜란드 저항조직이 런던으로 발신한 무전은 상황이 달랐음을 시사했다. "SS 사단 '호엔슈타우펜(Hohenstaufen)'이 이셀 강에 있다. 이 사단 소속 부대들이 아른험과 주트펜~아펠도른 도로 사이에서 목격되었다."
문제는 이 메시지가 제1공수사단에 전달된 것이 20일이 되어서야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즉, 낙하산병들이 이미 스스로 상황을 깨달은 지 한참 지난 뒤의 일이었다.
경고한 사람은 한 명뿐
설령 제2군 정보부의 보고가 훨씬 현실에 가까웠다 해도, 공수군단의 결의가 꺾였을 리는 없다는 것이 사실이었다. 제4낙하산여단장 해켓(Hackett) 소장은 자기 대대장들에게 병사들이 막대한 사상자를 각오해야 한다고 경고했지만, 소사보프스키의 회고에 따르면 사단의 다른 장교들은 자신감에 넘쳐 보였다.
얼쿼트 사령부에서 열린 회의에서 입을 열어 질문을 던진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소사보프스키는 훗날 이렇게 적었다. "그들은 지루해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마지막 다리를 너무 멀리 잡은 것 아닌가'
다만 회의 막바지에 한 사람이 아른험 교두보를 얼마나 오래 유지해야 하는지 물었다.
브라우닝(Browning) 중장도 며칠 전 몽고메리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었다. 답은 이러했다. "이틀이면 충분하다. 그때쯤이면 다른 부대들이 이미 도착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사흘은 버틸 수 있습니다." 브라우닝은 그렇게 답한 뒤 이렇게 덧붙였다. "그런데 우리가 마지막 다리를 너무 멀리 잡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