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 1769~1821)는 프랑스의 군인이자 정치 지도자로, 프랑스 제국의 황제였습니다. 그는 나폴레옹 제국을 수립하고 광대한 영토를 정복하며 프랑스의 위상을 크게 높였습니다.
생애

백성들에게 가장 좋은 길을 가리키는 지도자로 묘사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보나파르트의 집권 과정은 18세기 말 프랑스가 겪던 위기의 직접적인 결과물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는 정치적 자유와 평등한 권리를 추구하는 움직임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1789~1799)의 주요 성과들을 국내에서 공고히 하고, 대외적으로 이를 전파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나폴레옹 시대'의 영토 확장은 프랑스 국력 강화를 목표로 했습니다. 이를 통해 자유주의 사상이 퍼져나가 적대 세력(대체로 군주제 국가들)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프랑스 상품을 위한 거대한 시장도 형성되었습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769년 8월 15일, 제노바 공화국으로부터 프랑스에 넘어간 지 얼마 되지 않은 코르시카 섬의 수도 아작시오에서 태어났습니다.
군사 및 정치 경력
아작시오에서 학업을 마친 그는 10세 때 프랑스 브리엔의 군사학교로 진학했습니다. 1784년에는 파리 샹 드 마르스의 왕립군사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며, 16세에 포병 하사관으로 졸업했습니다.
군주제와 군 기율에 충실했던 그는 처음에는 프랑스 혁명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곧 태도를 바꿔 1791년 말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 집단이었던 자코뱅 클럽에 합류했습니다.
1794년 온건파의 반격으로 자코뱅파가 몰락하면서 나폴레옹도 투옥되었지만, 단 15일 만에 석방되었습니다. 그는 이듬해 툴롱 방어전에서 준장 계급을 얻은 상태였습니다.
1795년에는 프랑스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왕당파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무렵 그는 혁명 중 단두대에 처형된 귀족의 미망인이자 두 아이의 어머니인 조제핀 드 보아르네를 만났고, 1796년 3월 9일 그녀와 결혼했습니다.
결혼 이틀 후 그는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원정에 나서 연전연승을 거두며 파리로 돌아왔고, 군중들의 뜨거운 환호를 받았습니다. 이후 이집트 원정(1798~1799)에 나서 빠른 속도로 이집트를 점령했습니다.
1799년 파리로 돌아왔을 때, 프랑스는 내전의 위협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집정관 시대 (1799~1802)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799년 11월 9일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이날 그는 총재정부를 전복하고 의회를 해산한 뒤 정부를 장악했으며, 집정관 체제를 수립하고 제1집정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1800년에는 국민투표를 통해 헌법을 승인받았고, 1802년에는 영국과 아미앵 조약을 체결하여 평화를 모색했습니다.
이 시기 그는 프랑스 은행을 설립하고 가장 중요한 업적인 나폴레옹 법전(프랑스 민법전)을 정비했습니다. 로마법에서 영감을 받은 이 법률 체계는 그 본질이 오늘날까지도 유지되고 있습니다.
내외적으로 승승장구하던 그는 종신집정관이라는 칭호까지 받게 됩니다.
나폴레옹과 제국
국민투표를 통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황제로 추대되었고, 1804년 12월 2일 교황 비오 7세가 집전한 대관식을 거쳐 나폴레옹 1세, 즉 프랑스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원로원이 공화국의 이름으로 수립한 제국은 철권 통치로 운영되었으며, 나폴레옹은 상법과 형법을 새로 제정했습니다.
내정의 안정을 바탕으로 나폴레옹은 최대의 야심을 담은 계획, 즉 프랑스를 유럽 대륙 최강국으로 만드는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습니다.
수차례의 승리 끝에 황제는 중부 유럽 대부분을 손아귀에 넣게 되었습니다.
영국을 약화시키기 위해 나폴레옹은 '대륙봉쇄령'을 선포하여, 유럽 각국이 영국과의 무역을 위해 항구를 폐쇄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이 조치 덕분에 프랑스 산업은 유럽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1807년과 1808년에는 차례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침공했습니다.
무적처럼 보이는 군대를 이끌던 그는 1810년경 서유럽 거의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유일한 예외는 영국이었습니다.
같은 해 조제핀과 이혼한 그는 오스트리아 대공녀 마리 루이즈, 즉 프란츠 2세의 딸이자 브라질 초대 황후 레오폴디나(페드루 1세의 아내)의 자매와 재혼했습니다.
마리 루이즈 사이에서는 아들 나폴레옹 2세를 얻었지만, 그는 21세의 나이로 요절했습니다.

황후 마리 루이즈와 나폴레옹 황제가 아들을 프랑스 궁정에 소개하는 모습
러시아 제국과의 전쟁
1812년 러시아가 영국에 대한 봉쇄를 깨자, 나폴레옹은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침공했습니다.
모스크바에 도착했지만 도시는 이미 러시아인들 스스로 불태운 상태였습니다. 부대들은 혹독한 러시아의 겨울을 견디지 못하고 패배하여 철수했고, 살아서 귀환에 성공한 병력은 불과 3만 명에 불과했습니다.
같은 해 프랑스 본토는 연합군의 침공을 받았고, 나폴레옹은 1814년 권좌에서 물러나 지중해의 엘바 섬으로 유배되었습니다.
백일천하
1815년 3월, 나폴레옹은 엘바 섬에서 탈출하여 파리로 들어갔습니다. 부르봉 왕조의 복고에 분노하던 국민과 군대는 그를 뜨겁게 환영했습니다.
그는 백 일 동안 권력을 되찾았지만,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 연합군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하며 완전히 몰락했습니다.
승전국들은 빈 회의에 모여 유럽 지도를 다시 그렸습니다.
나폴레옹은 아프리카 연안의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호송되어 감금되었고, 1821년 5월 5일 그곳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그의 유해는 현재 파리 앵발리드의 영묘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나폴레옹의 명언
- 승리에게는 백 명의 아버지가 있지만, 패배는 고아다.
- 패배를 두려워하는 자는 반드시 패배한다.
- 사람은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울 때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싸울 때 더 용감하다.
- 젊은 날에 헛되이 흘려보낸 매 순간은 미래의 성공 가능성 하나를 잃는 것이다.
- 지도자란 희망을 파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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