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제1차 세계대전 말 독일이 스카파 플로우에서 전 함대를 자침시킨 내막

휴전과 독일 공해함대의 인턴먼트

1918년 11월 11일, 프랑스 콩피에뉴에서 휴전 협정이 체결되면서 4년간의 제1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렸다. 협정 조항에 따라 독일 U보트 함대는 연합국에 무조건 인도되었으나, 수상 함정의 처리는 별개의 문제였다. 이 함정들은 1898년부터 해군장관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 제독이 주도한 해군 증강 계획의 산물로, 식민 제국 수호와 영국 해군에 대한 우위 확보를 목표로 건조되었다. 영국 역시 맞대응 함대 확충에 나서면서 양국 간 군비 경쟁이 전쟁 발발의 한 원인이 되었다.

유틀란트 해전(1916)은 무승부로 끝났으나, 독일 공해함대(Hochseeflotte)의 상당 부분이 남은 전쟁 기간 동안 드라이독에 머물게 되면서 전략적 주도권은 영국이 쥐게 되었다. 중립국인 노르웨이와 스페인이 독일 함정 수용을 거부하자, 영국 해군 제독 로슬린 웨미스는 오크니 제도의 스카파 플로우에 함대를 인턴먼트(억류)할 것을 제안했다. 독일 최소 승조원만 남긴 채 영국 대함대(Grand Fleet)의 감시 하에 정박시키는 방식이었다.

스카파 플로우에서의 억류 생활과 승조원의 동요

1918년 11월 말, 루트비히 폰 로이터 제독 휘하 70척의 공해함대가 포스 만(Firth of Forth)에 집결한 뒤 영국 함대의 호위를 받아 스카파 플로우로 이동했다. 함포가 무력화된 후 함급별로 정박지가 배정되었으나, 일부 함정은 기관 고장과 기뢰 충돌로 제때 도착하지 못했다. 더 큰 문제는 승조원의 사기 저하였다. 1917년부터 장기전에 지친 수병들은 소극적 저항에서 시작해 공개 시위와 반전 운동으로 확대되었고, 1918년 11월 3일 킬 군항에서 일어난 수병 봉기로 이어져 독일 정권 붕괴의 도화선이 되었다.

스카파 플로우에 남은 200여 명의 감시 승조원(장교 포함) 역시 열악한 식사, 외부와의 단절, 무료한 일상 속에 규율이 무너졌다. 이들은 위원회를 구성해 장교의 명령을 승인하는 식으로 자치적 통제를 시도했으며, 일부는 '적위대'를 자처하며 명령 불복종을 선언했다. 결국 독일 본국은 단계적으로 수병을 송환했고, 초기 2만 명에서 5천 명 미만으로 줄어들었다.

자침 결정과 실행

연합국은 베르사유 조약 체결(1919년 6월 21일 예정)까지 함정 분배를 놓고 이견을 보였다. 로이터 제독은 처음부터 함정 인도를 막기로 마음먹고 휴전 조항의 '함정 침몰 금지' 조항을 무시할 작정이었으나, 본국의 지시를 기다리며 협상 추이를 지켜보았다. 그러나 독일에 가혹한 강화 조건이 부과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그는 6월 21일 오전 깃발 신호로 전 함대 자침 명령을 내렸다.

수병들은 킹스턴 밸브와 현창을 열고, 일부는 격벽에 구멍을 뚫어 침수를 가속화했다. 영국 측은 정오 무렵 전함 SMS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가 좌현으로 기울고 승조원들이 함기를 단 채 보트로 탈출하는 것을 목격하고 뒤늦게 대응했다. 스카파 플로우 경비 사령관 시드니 프레만틀 제독은 대어뢰 훈련을 이유로 주력 함대를 출항시킨 상태였고, 복귀까지 2시간 반이 걸려 대다수 함정이 이미 바다 밑으로 가라앉은 뒤였다.

영국의 구조 작업과 결과

프레만틀 제독은 남은 대형 함정이라도 구하기 위해 승조원을 투입해 좌초시키려 했으나, 구축함 18척과 경순양함 3척, 전함 SMS 바덴 1척 등 20척만 구조하는 데 그쳤다. 50여 척이 스카파 플로우 바닥에 가라앉았으며, 마지막 순양함 SMS 힌덴부르크가 오후 5시에 침몰했다. 이 과정에서 전함 SMS 마르크그라프 함장 등 9명의 독일 수병이 영국군의 총격에 사망했다. 생존자들은 인버고든 기지로 이송된 뒤 니그 포로수용소로 옮겨졌다.

로이터 제독은 HMS 리벤지 함상에서 프레만틀 제독으로부터 휴전 위반을 질책받았으나, "어떤 영국 장교라도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라고 맞섰다. 독일에서는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나 포로 생활을 거쳐 1920년 1월 석방되었고, 베르사유 조약에 따른 해군 축소로 5개월 뒤 예편했다. 나치 정권 시기 제독으로 진급했으나 2차 대전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전후 처리와 역사의 아이러니

영국은 경쟁국 해군력 증강을 막았다는 안도감 속에 좌초된 함정만 분할 인수하고, 나머지는 인양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방치했다. 1920년대 중반 한 사업가가 잔존 구축함 26척 중 24척을 인양한 데 이어 전함 5척과 순양함 2척을 추가로 끌어올렸고, 이후 인양 전문 회사에 권리가 넘어가 몇 척의 대형 함정이 더 수면 위로 올라왔다.

이들은 모두 고철로 처리되었는데, 핵실험 이전의 강철(저선량 강철)은 2차 대전 독일 U보트 건조용으로 독일이 다시 사들여 갔다. 1939년 10월, 귄터 프리엔 소령의 U-47이 스카파 플로우 방어를 뚫고 전함 HMS 로열 오크를 격침시킨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현재도 수심 47m에 달하는 7척의 독일 잔해는 인양되지 않은 채 남아 있으며, 1979년부터 기념물 및 고고학 유적으로 보호받고 있다. 다만 2019년 마르크그라프, 쾨니히, 크론프린츠 빌헬름 등 인접한 3척이 이베이에서 매각되는 등 논란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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