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군사 쿠데타는 조앙 굴라르(João Goulart)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1985년까지 21년간 지속된 브라질 군부 독재의 서막을 연 사건입니다.
개요
1964년 쿠데타는 민군 쿠데타(Golpe Cívico-Militar)로도 불리며, 브라질 군부가 당시 대통령이던 조앙 굴라르를 상대로 일으킨 정변입니다. 이 쿠데타는 국내 일부 민간 세력의 지지를 받았으며, 3월 31일 군부의 반란으로 시작되어 4월 9일 제도법 1호(AI-1) 공포로 마무리되었습니다.
1964년 군사 쿠데타란?
1964년 군사 쿠데타는 브라질 군부와 보수적인 경제 엘리트 세력이 결탁해 1961년 자니우 쿠아드루스(Jânio Quadros) 대통령 사임 후 취임한 조앙 굴라르(통칭 '장고') 정부를 전복한 음모였습니다.
병력을 동원해 국가 전략 거점을 장악한 군부는 의회 의원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위헌적으로 대통령을 축출했습니다. 이후 간접 선거를 통해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했으며, 이 쿠데타로 1985년까지 21년간 지속된 군부 독재 정권이 출범했습니다.
왜 군부는 1964년 권력을 장악했나?
군부가 브라질 민주주의를 무너뜨리고 조앙 굴라르를 축출하기에 이른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당시 브라질 사회와 정치에 존재했던 긴장 관계, 정부와 군부·경제 엘리트 간의 이해 충돌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배경: 조앙 굴라르 정부와 정치적 위기
1964년 쿠데타는 1961년부터 본격화된 브라질의 정치 위기, 특히 조앙 굴라르 정부 시기에 심화된 위기의 직접적 산물이었습니다. 다만, 브라질 정치권 내에 쿠데타 기도가 이미 이전부터 존재했음은 제툴리우 바르가스(Getúlio Vargas) 정권 시기와 주셀리누 쿠비체크(Juscelino Kubitschek, JK) 정권 이전 시기에도 확인된 바 있습니다.
굴라르 정부의 정치적 위기는 취임 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자니우 쿠아드루스 대통령 사임 후 부통령이던 굴라르가 대통령직을 승계하려 하자, 강력한 반대 세력이 형성되며 합법성 캠페인(Campanha da Legalidade)이 전개되고 내전 위기까지 고조되었습니다.
해결책으로 굴라르에게 권한을 제한한 의원내각제 하에서 취임하도록 허용했으며, 이 체제는 1961년 9월부터 1963년 1월까지 유지되었습니다. 이후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제가 복원되었습니다.
굴라르 정부는 국가의 강한 이념적 양극화를 특징으로 하며, 보수 세력의 쿠데타 모의로 이어져 군부 정권 탄생의 빌미가 되었습니다.
기본 개혁(Reformas de Base)과 엘리트의 반발
장고 정부 출범 당시 최대 과제는 인플레이션 통제와 외채 상환이었습니다. 굴라르 정부는 기본 개혁(Reformas de Base)이라는 구조적 개혁 프로젝트를 추진했는데, 농지·교육·은행·도시 등 핵심 분야의 개혁을 포함했습니다. 이 중 가장 큰 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농지 개혁이었습니다.
1963년 3월부터 8월까지 농지 개혁안이 의회에서 집중 논의되었으나, 대지주 이익을 대변하는 의원들이 수용 보상 방식을 놓고 정부와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서 논의는 교착 상태에 빠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여당이던 사회민주당(PSD) 의원들이 대거 야당으로 돌아서며 정부의 의회 기반이 급격히 약화되었습니다.
또 다른 쟁점은 1962년 제정된 이익 송금 제한법(Limitação de Remessa de Lucros)이었습니다. 이 법은 외국 기업의 해외 이익 송금을 순이익의 10%로 제한하는 내용으로, 미국 정부의 강한 반발을 샀습니다.
미국의 브라질 내정 개입
1964년 쿠데타에서 미국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미국은 굴라르 정부를 '극좌'로 규정하고 정권 불안정을 위해 비밀리에 개입했습니다.
미국은 중앙정보국(CIA) 자금으로 사회연구소(Ipes)와 브라질민주행동연구소(Ibad)를 운영하며 굴라르 정부 전복 공작을 폈습니다. 1962년 선거에서는 800명 이상의 보수 정치인 후보에게 이바드 자금이 지원되었으며, 이는 브라질 법으로 금지된 행위였습니다.
입에스는 겉으로는 브라질 사회 연구 기관으로 위장했으나, 실상은 다국적 기업인·군부 지도부·언론인이 참여한 최대 쿠데타 기획 기구였습니다.
미 육군의 직접 개입도 있었습니다. 미국 정부는 쿠데타 주축인 움베르투 카스텔루 브랑쿠(Humberto Castello Branco) 세력과 장기간 협상해 브라더 샘 작전(Operation Brother Sam)을 수립, 쿠데타 실패 시 미군이 브라질을 침공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쿠데타 전개 과정
굴라르 정부의 지지 기반이 붕괴되고 양극화가 심화되던 1963년 하반기, 9월 하사관 반란과 10월 계엄령 선포안의 의회 부결 등은 정부 위상을 결정적으로 약화시켰습니다.
지지 기반 상실로 위기에 몰린 굴라르는 개혁 노선과 좌파 진영에 더욱 밀착했습니다. 1964년 3월 13일 센트랄 두 브라질(Central do Brasil) 집회에서 기본 개혁을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완수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정부의 좌경화를 공식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보수 진영의 즉각적 대응은 자유를 위한 신과 가족 행진(Marcha da Família com Deus pela Liberdade)이었습니다. 상파울루에서 수만 명이 모인 이 집회는 쿠데타 명분 조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쿠데타 자체는 3월 31일, 주이스 지 포라(Juiz de Fora) 제4군구 사령관 올림피우 모라웅 피료(Olympio Mourão Filho)의 반란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의 부대가 리우데자네이루로 진군하며 정부 전복을 시도했으나, 이 행동은 카스텔루 브랑쿠와 입에스가 준비하던 계획과 어긋난 독단적 행동이었습니다. 한편 굴라르는 결정적 순간에 우유부단한 태도로 일관하며 효과적인 대응에 실패했습니다.
4월 2일, 상원의장 아우루 지 모우라(Auro de Moura)가 대통령직 공석을 선언하며 쿠데타는 정치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카를루스 라세르다(Carlos Lacerda), 마갈량이스 핀투(Magalhaes Pinto), 아데마르 지 바르수(Ademar de Barros) 등 유력 정치인들도 쿠데타를 지지했습니다.
라니에리 마칠리(Ranieri Mazzilli)가 임시 대통령직을 맡는 동안, 구성된 군부 위원회는 독재 체제 기반을 다졌습니다. 4월 9일 제도법 1호(AI-1)가 공포되었고, 이틀 뒤 카스텔루 브랑쿠가 간접 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승리의 혁명은 제정 권한의 행사에 부여된다. 이는 국민 선거 또는 혁명에 의해 표현된다. 이는 제정 권한의 가장 표현적이고 급진적인 형태이다. 따라서 제정 권한으로서의 승리의 혁명은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이전 정부를 전복하고 새 정부를 구성할 능력을 갖는다."1
이로써 1985년까지 21년간 지속된 브라질 군부 독재가 공식 출범했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의 군부 쿠데타와 브라질
20세기 후반은 아메리카 대륙 전역에 수많은 군부 독재가 출현한 시기였습니다. 군부 권위주의 정권은 브라질만의 현상이 아니었습니다. 볼리비아(1964), 아르헨티나(1966, 1976), 우루과이(1973), 칠레(1973), 페루(1968), 과테말라(1954), 파라과이(1954) 등에서 각기 다른 시기에 쿠데타로 군부 정권이 들어섰습니다.
1964년 쿠데타의 여파와 유산
1964년 쿠데타로 수립된 군부 독재는 21년간 브라질을 지배하며 다음과 같은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 탄압과 인권 유린: 정권에 반대하는 시민들을 체계적으로 탄압·고문·실종·살해했습니다.
- 언론·문화 검열: 문화·지적 생산물에 대한 철저한 검열로 표현의 자유를 봉쇄했습니다.
- 부패 구조화: 정부 감시 기능이 마비되어 부패가 만연했습니다.
- 사회 불평등 심화: 빈부 격차가 극도로 확대되었습니다.
- 경제 지표 악화: 외채 등 주요 경제 지표가 크게 악화되었습니다.
1 제도법 1호 전문. 원문 보기
이미지 출처: FGV/CPDO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