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스페인 테르시오(Tercio) 부대를 따라다닌 '모소(mozo, 청년/하인)'들은 단순한 심부름꾼이 아니었다. 그들은 물지게꾼, 짐꾼, 요리사, 청소부, 심부름꾼, 식량 조달자, 그리고 전장에서는 약탈자이자 시체 벗기기꾼이었으며, 때로는 병사의 무기를 대신 들어주거나 병영 사기에 동원되기도 했다. 이 글은 역사가들이 종종 간과해온 이 '보이지 않는 군대'의 실체를 조명한다.
나이: 소년부터 청년까지
대중문화(아르트리스트 사가의 이니고 발보아나 훌리안 로메로의 전설 등)에서는 모소를 어린 소년이나 청소년으로 묘사하지만, 현실은 더 복잡했다. 카를로스 콜로마(Carlos Coloma)의 기록에 따르면 "15세에 미치지 못한 아이들"부터 "제 나이에 이른 청년들(18~22세)"까지 다양했다. 1526년 밀라노 포위전에서는 이 '제 나이의 청년들'이 어린아이들만으로는 불가능한 작전을 수행하는 핵심적 역할을 맡기도 했다.
1544년 칙령: 나이 제한의 이면
1544년 크레피 조약 이후 카를 5세가 군대를 해산하며 내린 명령은 "18세 미만 비스페인인 모소는 해고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스페인인 모소는 예외였다. 타향 플랑드르에서 주인만을 의지해 살아가는 이들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명령은 '불필요한 입'을 줄여 헝가리 원정을 앞둔 테르시오의 행군 부담을 덜려는 의도도 깔려 있었다.
'스페인인'이 되는 길: 귀화의 통로
1517년 나폴리 총독 라몬 데 카르도나(Ramón de Cardona)는 6,000명의 병사가 롬바르디아에서 나폴리로 귀환했는데, 이는 자신이 알던 3,000명보다 두 배나 많다고 기록했다. 그는 이들이 "로마 및 기타 이탈리아 출신의 마부들, 그리고 합류한 스페인인들"이라고 분석했다. 병사의 모소로 복무하는 것은 군 경력을 쌓는 길이자, 나아가 '스페인인'으로 귀화하는 지름길이었다. 일찍 시작할수록 유리했다.
국적별 구성 비율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536년 칙령은 부르고뉴인, 이탈리아인, 사르데냐인은 '오래 복무했다'는 이유로 해고 예외로 뒀다. 스페인 병사들은 주둔지에서 현지 청년들을 모소로 삼았는데, 바르바리(북아프리카)의 이교도나 개신교 지역 출신은 기피 대상이었으나 그 외에는 큰 제약이 없었다. 일부 학자는 '피카로(pícaro, 건달/악당)'라는 단어가 1544년 피카르디(Picardy) 지방을 떠돌던 현지 불량배들이 보병이 되면서 생긴 말일 수 있다고 본다.
모소의 임무: 심부름에서 전장까지

모소의 공식 임무는 물 긷기, 짐 나르기, 배낭 메기, 가사 노동, 요리, 청소, 심부름, 식량 구매, 사료 조달(주로 기병용) 등이었다. 행군 시에는 주인의 자리를 대신해 무기를 운반하기도 했으나(출발/도착 시에는 병사가 직접), 이는 메츠 군령(1552) 제19조 위반이었다. '갑옷 수호자(페초과르다)'로서 주인의 갑옷 착용을 돕는 전문적 역할도 있었다.
비공식적이지만 필수적인 임무는 식량 확보(주인이 못 사거나 살 게 없을 때 훔치기), 전투 후 약탈과 시체 벗기기(전리품 수거)였다. 이는 역사가들이 흔히 '캠프 팔로워(종군 여성 등)'의 몫으로 돌리던 일이었다. 포위전에서는 여성·가족과 함께 '불필요한 입'으로 분류돼 배급이 줄거나 축출되기도 했다.
학대와 이주, 그리고 준가족 관계
모소는 군율 적용을 받아 태형·구타·벌금 대상이었으나, 주인 명령으로 저지른 죄에 대해서는 주인의 말이 우선이었다. 신체적·정서적 학대가 빈번했으며, 이는 당시 가정 내 폭력이 '교정'으로 여겨지던 시대상과 맞물린다. 이에 모소들은 더 나은 주인을 찾아 부대 내를 떠도는 일이 잦았으나, 이는 기율 위반이었다.
병사들은 처자식과 모소를 데리고 육로로 이동했고, 해상 이동 시에만 공간·식량 문제로 제한이 있었다. 수년(때로는 10년 이상) 함께하며 준가족이 되었고, 많은 병사가 모소를 정식 병사로 입대시키려 후원했다.
거의 병사: 전장에서의 실질적 역할

공식적으로 전투 임무는 없었으나, 실제로는 병사와 다름없는 행동을 했다. 알레산드로 파르네세(Alessandro Farnese)는 1580년 헨트 공격 시 "배낭병들이 횃불을 들고 뒤따라가 병사들이 살육하는 동안 집에 불을 질러 후방을 확보하게 했다"고 기록했다. 이들은 정기적으로 요새 함락 시 약탈, 적 짐마차 습격, '스코프(정찰/습격)'에 참여했다. 스코프에서는 포로 납치·몸값 요구가 목적이었으나, 실제로는 패잔병을 단도로 학살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전술적 기만에도 동원됐다. 모소들을 부대처럼 세워 병력 과시용으로 쓴 것이다. 이들은 '선과 악 양면에서 거의 병사'였고, 적의 분노를 그대로 뒤집어쓰기도 했다. 전공을 세워 표창을 받고 특혜를 얻은 사례도 여럿 기록돼 있다.
죽은 자리(플라자 무에르타): 병영 사기의 온상

중대 장교와 급료 장교가 짜고 모소를 병사로 둔갑시켜 '플라자 무에르타(죽은 자리, 허위 병력)'를 채우는 사기가 공공연했다. 무기와 유아용 옷을 입혀 점호(무에스트라)에 세우는 수법이었다. 당연히 10대 청소년으로는 불가능했기에, 점호에 선 모소들은 청년층이었다. 1546년 부렌 백작 휘하 스페인 기(旗) 점호 기록에는 "안토니오 델 푸에르토, 공증인의 모소", "프란시스코 벨레스(또는 베예스)의 모소"처럼 이름조차 없이 '모소'로만 기재된 병사들이 등장한다.
한 테르시오를 따르는 모소의 수
론도뇨(Londoño)의 권고(병사 10명당 모소 1명, 장교 1명당 모소 1명)와 1538년 반란 병사들의 요구(흉갑병 1명당 모소 1명, 타 병과 2명당 모소 1명)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다. 전자는 중대(300명)당 53명, 후자는 약 170명이다. 실제로는 병사의 경제력에 따라 '먹여 살릴 수 있는 만큼' 뒀다.
- 1526년 밀라노: 5,000명 모소(앞서 언급)
- 1532년 빈 구원군(이탈리아 출발): 스페인 보병 10,400명(26기 × 400명)에 여성·모소 6,000명(세레세다 기록 여성 2,500명 → 모소 약 3,500명, 병사 3명당 모소 1명)
- 1538년 크리스토발 데 모랄레스 테르시오(헝가리행): 병력 1,800~2,000명에 '짐짝 3,000개'라 불린 여성·아동·모소 약 1,000명
- 오시오 데 앙굴로(Osorio de Angulo) 제3시칠리아 테르시오(플리싱엔행): 3기(최대 900명)에 장교·모소 합쳐 1,500 '입' → 여성 제외 시 모소 약 600명
종합하면 병사 4~5명당 모소 1명 꼴이다. 부대 주둔 기간이 길고 현지 여건이 좋을수록 늘고, 전시·이동 중엔 준다. 1만 병력 기준 약 2,000명 모소가 뒤따랐다.
결론: 군대의 보이지 않는 기둥

모소는 16세기 군대의 근간을 이룬 필수 인력이었다. 병사는 그들의 노동 없이는 군무에 집중할 수 없었고, 지휘부도 테르시오가 모소 없이 굴러갈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스페인에서 어린 모소로 입대해 주인과 이탈리아, 헝가리, 프랑스, 독일, 플랑드르, 바르바리를 전전하며 갑옷을 닦고 머스킷을 나르고 전쟁의 속살을 익힌 청년이 20세에 이르면, 그는 그 어떤 신병보다 숙련된 병사가 되어 있었다. '전쟁의 젖을 먹고 자란' 셈이다.
반면 현지에서 모집된 피카르디 소년, 독일 아이, 헝가리 청소년들은 한두 철 복무하며 점령지 약탈로 연명하다 주인이 본국으로 돌아가면 가차 없이 해고됐다. 출신과 경로가 어떻든, 이들은 약탈·정찰·방어 공사 등 실전 경험을 쌓으며 병사로 편입될 기회를 얻었다. 알론소 바스케스(Alonso Vázquez)가 지적했듯 '국가 충성심'이나 '이단적 성향' 같은 문제가 없진 않았으나, 당장 쓸 수 있는 검증된 인력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설령 성인이 되어 민간으로 돌아가더라도, 이들이 군대에서 짊어진 역할(물 긷기, 땔감 마련, 투구 닦기 등)은 병사를 '병사다운 일'에만 전념하게 해준 숨은 기여였다. 글을 모르는 아동 노동력이 넘치던 시대, 장인에게도 도제가 있었듯 군대에도 모소가 있었던 것이다.
주석
[1]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Arturo Pérez-Reverte)의 『알라트리스테(Alatriste)』 사가를 가리킴. 화자 이니고 발보아(Íñigo Balboa)는 '대위'의 배낭병으로 나와 군 생활을 시작함.
[2] 유명한 훌리안 로메로(Julián Romero)가 배낭병이나 드러머로 시작했다는 설. 로페 데 베가(Lope de Vega)도 희곡에서 이를 언급. 그의 심문 기록(AHN, 인키시시온, 톨레도, Leg 359, doc 1223, 안토니오 마리찰라르 인용)에 "15~16세에 전사들을 따라 고향을 떠났다"(1534년)는 구절이 있어, 당시 병사로 입대하기엔 너무 어렸으므로 모소였을 가능성 큼. 어쨌든 최하층에서 출발해 원수(Field Marshal)까지 올랐고 플랑드르 전쟁위원회 위원이 됨.
[3] 두 인용문 모두 병사 출신 작가 카를로스 콜로마의 『네덜란드 전쟁사(1588~1599)』에서 나옴.
[4] 라몬 데 카르도나, 나폴리 총독이 신성 가톨릭 폐하께 올린 서한. 1517년 10월 5일. BNE MSS/20210/11/1 면 7~8. 카르도나의 수치: 마지막 급료일 2,860명 해고, 브레시아·베로나 잔류 700명, 베르나트 리바스 데 팔레르모 선박으로 스페인 귀환 500명.
[5] 레이먼드 파헬(Raymond Fagel)에 따르면 1546년 스페인 3개 중대에 외국인 75명(약 10%). 구성: 프랑스 28, 이탈리아 13, 독일 5, 저지대 독일 11, 부르고뉴 7, 로타링기아 1. 출처: De Hispano-Vlaamse Wereld. De contacten tussen Spanjaarden en Nederlanders, 1496-1555, 브뤼셀 1996.
[6] 메츠 군령(1552) 제19조: "병사가 아닌 자는 수하물 수레 뒤를 따라 기(旗)와 함께 행군할 때만 대열에 낄 수 있음. 위반 시 밧줄 세 대와 재산 몰수."
[7] 레이먼드 파헬 교수 제공 자료(석사 논문 발췌). 1546년 부렌 백작 휘하 스페인 기 점호부(ARAB, Audiëntie, 2811).
[8] 카르타헤나/말라가에서 나폴리/제노바까지 항해는 10일 내외지만, 모병부터 출항까지 수개월 소요: 총독·대사·왕 승인 → 대장 특허장 발급 → 대장(보통 궁정 체류 중) 모병지로 이동 → 장교 임명 → 모병읍 순회(북 치며 7~12명씩 모집) → 중대 집합 → 출항항 이동. '신속'해도 3~4개월, 예외적으로 7~8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