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그림자 권력'이라는 수식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서로마 제국 말기의 장군 플라비우스 리키메르(Flavius Ricimer)다. 황제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 황제 자신이 실력자의 허수아비로 전락하고, 심지어 황제를 지명하는 이가 실력자였던 시대. 리키메르는 11년 동안 무려 네 명의 황제를 세우고 폐위시키며 그 정점을 찍었다.
수에보족 왕자에서 로마의 실력자로
리키메르는 이베리아 반도 북서부의 로마 속주 갈라에키아 출신의 아리우스파 수에보족이었다. 5세기 들어 수에보족은 알란족과 함께 이 지역에 왕국을 세웠는데, 로마와의 포이데우스(foedus, 연방 조약)를 통해 명목상 로마의 종속국이 되었다. 그는 수에보 왕 레퀼라의 아들이자 왕국 창시자 헤르메리크의 손자였으며, 모계로는 서고트족 왕 왈리아의 외손자였다.

서고트족과 수에보족은 원래 혼인을 통해 동맹 관계였으나, 훗날 적대 관계로 돌아서면서 서고트족이 우위를 점했다. 이 정세 변화가 리키메르로 하여금 로마로 건너가 출사하게 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수도 라벤나에서 당대 최고 장군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휘하에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아에티우스 사후의 권력 공백과 리키메르의 부상
당시 발렌티니아누스 3세 치하에서 마기스테르 밀리툼(magister militum, 최고 군사령관)이던 아에티우스는 훈족 아틸라를 카탈라우눔 평원 전투에서 격퇴하는 등 전공을 세웠으나, 황제의 경계심을 사 454년 황제 손수 살해당했다. 이듬해 발렌티니아누스 3세마저 암살되자,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원로원 의원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가 황제위를 찬탈했으나, 반달족 겐세리크가 로마로 진군하자 공포에 휩싸인 민중이 그를 살해했다. 이어 서고트족 왕 테오도리크 2세의 지원을 받은 에파르키우스 아비투스가 황제에 올랐다. 아비투스는 리키메르를 코메스(comes, 측근/백작)로 임명했고, 리키메르는 독일인 용병으로 군대를, 함대를 꾸려 반달족을 아그리젠툼(육전)과 코르시카 인근(해전)에서 격파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로써 마기스테르 밀리툼 프레센탈리스(magister militum praesentalis, 좌우 군사령관)에 올라 원로원의 신임을 얻고, 옛 동료 마요리아누스를 황제로 옹립하기에 이른다.
마요리아누스: 개혁 군주와의 결별

457년 즉위한 마요리아누스는 전임자들과 달랐다. 동로마 황제 레오 1세의 승인을 받은 그는 갈리아 수복, 히스파니아 평정, 테오도시우스 법전 보완, 데펜소르(defensor, 호민관) 제도 부활로 하층민 보호에 나서는 등 입법·군사 양면에서 뛰어난 개혁 군주였다. 문제는 그가 리키메르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 했다는 점이다.
460년 반달족에게 발렌시아 인근에서 함대가 격파당하자, 실망한 원로원과 리키메르는 군대 반란을 부추겨 마요리아누스를 체포, 461년 여름 참수했다. 이 암살로 갈리아의 아에기디우스, 달마티아의 마르켈리누스, 히스파니아의 네포티아누스 세 장군이 반기를 들었고, 리키메르는 3개월간 황제 없는 정국을 주도해야 했다.
허수아비 황제들과의 줄다리기
원로원은 리비우스 세베루스를 추대했다. 그는 리키메르에게 완벽한 꼭두각시였으나, 동로마 레오 1세와 세 반군 장군의 승인을 받지 못해 정통성 위기에 시달렸다. 반달족 위협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비잔티움의 도움이 절실했던 리키메르는 465년 세베루스를 독살하고 18개월간 단독 실권자가 되었다.

레오 1세는 일리리아 출신 장군 프로코피우스 안테미우스를 새 서방 황제로 파견했다. 안테미우스는 마르켈리누스를 동반하고 테오도시우스 왕조와 혼인 관계인 명문가 출신으로, 리키메르에게 또 다른 걸림돌이었다. 리키메르는 딸 알리피아를 안테미우스에게 시집보내며 타협했다.
반달족 원정의 실패와 내전
안테미우스가 마르켈리누스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반달족 소탕전을 벌였으나, 비잔티움 장군 바실리스쿠스의 함대 격침, 마르켈리누스 피살, 헤라클리우스 군의 고립으로 삼면 협공은 대참패로 끝났다. 반달족이 이탈리아를 재침공하고 서고트족마저 무장을 하자, 안테미우스는 리키메르 측근인 마기스테르 오피키오룸(magister officiorum, 궁정 대신)을 반역죄로 처형하며 사실상 리키메르를 겨냥했다.

파비아 주교 에피파니우스의 중재도 소용없었다. 472년 내전이 발발했고, 병약하고 편집증적이던 안테미우스는 로마에 갇혀 옛 성 베드로 대성당에 피신했다. 겐세리크는 이 틈을 타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의 친척이자 발렌티니아누스 3세 외증손인 플라비우스 안키우스 올리브리우스를 중재 후보로 내세웠고, 레오 1세도 반달족 압박에 이를 수용했다.
최후의 도박과 죽음
리키메르는 반달족 왕이 황제를 좌우하는 상황을 막고자 역으로 올리브리우스를 황제로 선포하는 초강수를 뒀다. 5개월 포위 끝에 조카 군데발두스가 갈리아 군단을 이끌고 구원오자 로마는 함락되었고, 거지 행색으로 도망치던 안테미우스는 처형됐다.

올리브리우스는 황제위를 원치 않았고 레오 1세도 승인하지 않았으나, 리키메르는 승리한 듯 보였다. 하지만 그는 472년 8월, 내출혈(독살설과 암설 존재)로 사망했다. 조카 군데발두스가 마기스테르 밀리툼을 계승해 그리케리우스를 황제로 세웠으나, 서로마는 이미 종언을 고하고 있었다. 그리케리우스 1년, 율리우스 네포스 5년을 거쳐 476년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헤룰리족 오도아케르에게 폐위되며 서로마 제국은 멸망했다. 흥미롭게도 오도아케르는 4년 전 리키메르에게 병력을 빌려준 장본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