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들 간의 오랜 전쟁을 끝낸 코루페디움 전투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과 제국의 분열

고대 최대 제국 중 하나가 그 창시자의 카리스마만으로 지탱되다가, 그가 죽자마자 무너져 내린 경우는 드물다. 알렉산더 대왕이 바로 그 사례다. 아버지 필리포스 2세의 업적을 계승한 알렉산더는 그리스를 정복하고 페르시아 제국, 이집트, 페니키아를 거쳐 인도까지 진격했다. 기원전 323년, 말라리아나 장티푸스(혹은 독살)로 갑작스럽게 사망했을 때 그의 나이 32세였다. 그의 수첩(히포므네마타)에는 북아프리카 정복 계획이 적혀 있었으나, 10년 넘게 원정에 지친 병사들의 거부로 인더스 강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명확한 후계자가 없었다. 아내 로크사네는 임신 중이었으나 '야만인' 혈통이라는 이유로 반대가 심했고, 첩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헤라클레스는 정통성이 없었다. 이복동생 필리포스 아리다이오스는 지적 장애가 있었다. 권력 공백 속에서 필로이(친구들), 소마토퓔라케스(호위병), 디아도코이(장군들), 일반 병사 등 각 세력이 저마다의 후보를 내세웠다.

바빌론 회의와 최초의 분할

합의에 이르지 못한 채 직책 분배로 타협했다. 페르디카스가 칠리아르크(총리 격)와 에피멜레타(총독)을, 크라테로스가 필리포스 아리다이오스의 프로스타테스(후견인)를, 셀레우코스가 히파르크(기병대장)을 맡았다. 안티파트로스는 마케도니아와 그리스의 섭정을, 그의 아들 카산드로스는 휘파스피스타이(정예 보병) 지휘권을 가졌다.

사트라피(총독령)도 분배됐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집트를(훗날 클레오파트라 왕조로 이어짐), 안티고노스 1세는 리키아·프리기아·팜필리아, 리시마코스는 트라키아, 셀레우코스는 바빌로니아 등을 받았다. 에우메네스는 카파도키아와 파플라고니아 정복권을 얻었다. 박트리아와 아테네 중심의 그리스 일부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피로 진압됐다.

디아도코이 전쟁의 전개: 4차례의 혈투

알렉산더 사후 3년 만에 제1차 디아도코이 전쟁이 발발했다. 프톨레마이오스가 키레나이카를 병합하자, 올림피아스의 딸과 혼인하려던 페르디카스가 그를 치러 나섰기 때문이다. 이후 20여 년간 4차례 전쟁이 이어졌다. 기원전 314년 안티고노스가 사트라피 재분배를 요구하며 제3차 전쟁을 일으켰을 때, 그는 이미 에우메네스와 셀레우코스를 꺾고 소아시아를 장악한 최강자였다. 프톨레마이오스와 안티고노스가 승패 없이 휴전(기원전 311년)한 그해, 카산드로스가 알렉산데르 4세와 로크사네를 살해하며 알렉산더의 직계가 끊겼다.

셀레우코스는 동쪽으로, 프톨레마이오스는 키프로스와 에게 해로 세력을 넓혔다. 안티고노스가 그리스에서 카산드로스를 몰아내고 바실레우스(왕)을 자칭하자, 다른 디아도코이들도 각자 왕을 칭하며 헬레니즘 왕조(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셀레우코스 왕조 등)가 탄생했다. 카산드로스의 반격으로 그리스에서 4년간 싸웠으나, 기원전 301년 입수스 전투에서 리시마코스·셀레우코스·프톨레마이오스 연합군이 안티고노스를 격살하며 전세가 기울었다.

데메트리오스 폴리오르케테스의 부침

승자들은 안티고노스의 영토를 나눴으나, 그의 아들 데메트리오스(별명 폴리오르케테스, '포위망 파괴자')가 살아남아 로도스 포위전 등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는 승자들 사이의 분열을 틈타 마케도니아 왕위를 차지했으나 민심 을 얻지 못했고, 리시마코스와 에페이로스의 퓌로스 연합군에 밀려 셀레우코스에게 망명, 평생 감금됐다.

코루페디움 전투: 최후의 결전

리시마코스는 마케도니아 남부, 트라키아, 소아시아 대부분을 차지해 최대 수혜자가 됐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집트 안정에, 셀레우코스는 소아시아 동부부터 페르시아·시리아·페니키아에 이르는 광활한 땅을 확보했다. 그러나 마지막 장이 남아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이집트 왕의 아들로 성격 문제로 상속권 박탈)가 리시마코스에게 망명했으나, 리시마코스의 아내 아르시노에(케라우노스의 누이)가 자기 아들 아가토클레스의 계승을 위해 그를 처형시켰다. 과부가 된 아르시노에가 셀레우코스에게 피신해 마케도니아 탈환을 부추겼다.

기원전 281년, 리디아의 코로스 평원(코루페디움)에서 두 노장의 군대가 맞붙었다. 헤라클레이아의 메논이 포티오스의 비블리오테카(9세기)에 인용해 전한 바에 따르면, 리시마코스는 보병 51,000, 기병 8,300, 전투 코끼리 25마리를, 셀레우코스는 보병 31,500, 기병 9,500, 코끼리 60마리, 낫 달린 전차 15대를 동원했다. 고령에도 두 왕이 직접 참전했고, 헤라클레이아 출신 말라콘이 창으로 리시마코스를 찔러 죽였다고 한다.

문학적일지 모르나 감동적인 일화도 전해진다. 패잔병이 흩어진 뒤 며칠 동안 리시마코스의 시신이 방치됐는데, 충직한 개 한 마리가 곁을 지키며 식탐하는 새들로부터 시신을 지켰기에 겨우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전투의 여파와 헬레니즘 왕국의 완성

코루페디움 전투로 프톨레마이오스 이집트를 제외한 알렉산더의 옛 영토 대부분이 셀레우코스 수중에 들어가 셀레우코스 제국이 성립했다. 다민족 영토 위에 마케도니아계 지배층이 그리스 문화를 전파하며 2세기 말 내전으로 해체될 때까지 존속했다. 흥미롭게도 마케도니아 본토는 셀레우코스의 차지가 되지 못했다.

셀레우코스는 승리 직후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에게 암살당했다. 케라우노스는 아르시노에를 퓌로스와 결혼시키려 했으나 그녀는 도망쳐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와 재혼했다. 케라우노스는 갈리아족 침입 때 전사했고, 동생 멜레아그로스가 2개월 만에 죽는 등 단명 왕들이 이어지다 데메트리오스의 아들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가 마케도니아 왕위를 굳혀 안티고노스 왕조를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