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에서 통일로: 춘추전국시대와 진나라의 등장
중국은 진나라 시황제(진시황)가 기원전 221년 천하를 통일하기 전까지 백여 개에 달하는 제후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주나라 왕실을 명목상의 종주로 삼았으나, 실질적으로는 각자 도생하는 봉건 제후국들이었다. 오(吳), 월(越), 초(楚), 진(秦) 같은 강국은 '오랑캐'로 분류되어 주나라의 종법 질서 밖에 머물렀다.
기원전 8세기경 춘추시대가 열리면서 진(晉), 초(楚), 제(齊), 진(秦) 네 강국이 패권을 다투다, 전국시대에는 초(楚), 한(韓), 제(齊), 진(秦), 연(燕), 위(魏), 조(趙) '전국칠웅'만 남게 되었다. 진시황은 서쪽의 파(巴)·촉(蜀)을 정복한 여세로 나머지 여섯 나라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최초로 중국을 통일했다. 그는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실시해, 혈연이 아닌 능력 있는 관리를 파견해 중앙 집권을 완성했다. 화폐·문자·도량형 통일, 만리장성 축조, 병마용 제작 등도 이 시기에 이뤄졌다.
한나라의 봉건제 부활과 제후왕의 비대화
진나라가 15년 만에 멸망하고 한나라가 들어서자, 고조 유방은 진의 가혹한 중앙 집권에 반발해 친척과 공신들을 제후왕으로 봉하는 '군국병행(郡國竝行)' 정책을 폈다. 세월이 흐르며 이 제후왕들은 독자적인 조세·입법·주조권을 행사하며 국가의 1/3 이상을 장악하는 세력으로 커졌다. 특히 오나라 왕 유비(劉濞)는 구리와 소금 산지로 막대한 부를 축적해 중앙 정부의 눈엣가시가 되었다.
보드게임 '유보(六博)' 시비와 반란의 불씨
기원전 156년 경제(景帝) 유계가 즉위했다. 그는 제후왕의 권력을 깎아내려 중앙 집권을 강화하려 했다. 그런데 오나라 왕 유비는 경제의 사촌이자 고조의 조카로, 둘 사이에는 깊은 원한이 있었다. 경제가 태자 시절, 유보(六博)라는 주사위 보드게임을 하다 유비의 아들이 무례하게 굴자 격분해 보드판으로 때려죽인 사건이 빌미였다. 이 개인적 원한이 정치적 대립과 맞물려 파국으로 치달았다.
조조의 계략과 칠국의 봉기
경제의 신임 대신 조조(晁錯)는 '제후왕의 죄를 빌미로 영토를 삭감하면 그들이 조급히 반란을 일으킬 것이고, 준비 없는 반란은 쉽게 진압할 수 있다'고 진언했다. 기원전 154년, 조조의 계책대로 초왕 유무(劉戊)는 국상 모친 상중에 성관계를 가졌다는 죄로, 교서왕 유앙(劉卬)은 횡령죄로, 오왕 유비 등 나머지 제후왕들도 갖가지 죄목으로 영지를 깎였다.
예상대로 오·초·교서·교동·치천·제남·조(趙) 일곱 나라가 들고일어났으니, 이것이 유명한 칠국지란(七國之亂)이다. 기북·제나라는 참전을 약속했다가 불발되었고, 회남·여강·형산도 관망했다. 반란군은 동해·민월·흉노의 원군을 기대했으나, 동해와 민월만 병력을 보냈을 뿐 흉노는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주아부의 지략과 반란 진압
조조는 궁중 정적 원앙(袁盎) 등의 모함으로 '불필요한 전쟁을 부추겼다'는 죄로 그해 처형당했다. 최고의 책사를 잃은 경제는 노장 주아부(周亞夫)를 대장군으로 임명했다. 주아부는 오초 연합군이 포위한 양나라(경제의 친동생 유무가 다스림) 수도 수양(睢陽)으로 직행하지 않고,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고사(固柵) 작전'을 폈다. 식량이 떨어진 반란군은 주아부 진영을 무리하게 공격하다 대패했고, 굶주림에 군심이 무너졌다.
반란의 종결과 중국의 완전한 통일
오왕 유비는 동해로 도망쳤다가 살해되었고, 초왕 유주는 자살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승장 주아부 역시 '승리에 너무 기뻐하다' 병사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약속을 어긴 제나라 왕 유장려(劉將閭)는 경제에게 용서받았으나 부끄러워 자살했고, 교서왕 등 나머지 주모자들도 사형당했다. 흉노 원군을 기다리던 조왕 유수(劉遂)도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반란은 석 달 만에 진압되었다.
칠국지란의 진압으로 한나라 중앙 정부는 제후왕의 군대·세금·인사권을 회수하고, 제후왕을 녹봉만 받는 명목상의 귀족으로 격하시켰다. 진시황이 시작한 통일의 대업이 비로소 제도적으로 완성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