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휘하의 원수, 세바스티아니 드 라 포르타 백작
1772년 11월 17일 코르시카 라포르타 출생 ~ 1851년 7월 20일 파리에서 별세

군 입대와 혁명 전쟁 시기
성직자의 길보다 군복을 선택한 세바스티아니는 1789년 벤티밀리아 연대에 소위 계급으로 입대했습니다. 처음에는 고향 코르시카에 배치되었고, 1794년 6월에는 알프스 방면군으로 전출되었습니다. 데고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으며 아르콜 전투에도 참전했고, 1797년 말에는 기병 중대장으로 승진했습니다. 1799년 4월 28일 베르데리오에서 포로로 잡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석방되었습니다.
브뤼메르 쿠데타와 나폴레옹의 신뢰
파리 수비대에 근무하던 그는 1799년 브뤼메르 19일(11월 10일) 생클루에서 반발하는 의원들을 용기병을 동원해 몰아내는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보나파르트는 이 공로를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1800년에는 마렝고 전투와 민치오 강 도하 작전에 참여했으며, 콘스탄티노플과 이집트에서 임무를 수행한 뒤 1803년 준장으로 승진했습니다.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중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1805년 12월 21일 소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대사 활동과 스페인 전역
1806년 5월 2일 콘스탄티노플 주재 대사로 임명되어 1808년 4월 27일까지 근무했으며, 이후 다시 전장으로 돌아가 스페인에서 무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는데, 특히 1809년 8월 11일 알모나시드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술트 원수와 조제프 국왕이 황제를 겨눈 음모에 가담하기를 거부했지만, 나폴레옹은 헛된 소문에 흔들려 그를 의심했고 두 사람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었습니다.
러시아 원정과 1813년 전역
1812년 드리사(7월 15일)와 인코보(8월 8일)에서 연달아 실패를 겪었지만, 모스크바 전투에서 명예를 만회했습니다. 러시아 원정 말기에는 대육군 기병대의 잔존 병력 지휘를 맡았고, 1813년의 모든 주요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적의 창에 가슴을 찔리는 중상을 입었지만 끝내 지휘관 자리를 지켰으며, 하나우 전투(10월 30~31일)에서 바이에른군을 격파하고 프랑스 전역의 마지막 전투들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펼쳤습니다.
백일천하와 망명 생활
백일천하 기간 동안 나폴레옹은 세바스티아니에게 베르시와 라 빌레트 사이 구간의 파리 방어를 맡겼습니다. 이후 그는 1816년 5월까지 영국으로 망명하여 지냈습니다.
정치 경력과 원수 칭호
1819년 코르시카 대표 의원으로 선출되어 야당 의석에 앉았으며, 1824년에는 재선에 실패했습니다. 1826년에는 엔주의 자유주의 유권자들이 푸아 장군의 후임자로 그를 선택했습니다. 루이필리프 정부에서는 해군장관(1830년 8월 11일~11월 17일), 외무장관(1830년 11월 17일~1832년 10월 11일)을 역임했고, 무임소 장관으로 있다가 1834년 4월 나폴리 주재 대사로 임명된 뒤 1840년까지 런던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했습니다. 1835년에는 엔주 의석을 내놓고 다시 코르시카 의원 자리를 얻었습니다. 1809년 말부터 제국 백작이었던 그는 마침내 1840년 10월 프랑스 원수로 임명되었습니다.
생애의 마무리와 유산
1851년 파리에서 세상을 떠난 세바스티아니는 앵발리드에 안장되었으며, 그의 이름은 에투알 개선문에 새겨져 후세에 전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