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중세 유럽의 도시 르네상스: 봉건 사회 속에서 피어난 도시의 부흥

중세 유럽의 도시 르네상스: 봉건 사회 속에서 피어난 도시의 부흥

By Tales Pintos

중세 유럽은 대체로 농촌 중심의 사회·경제 구조로 특징지어집니다. 5세기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로마 제국의 도시들이 쇠퇴하면서 주거와 경제 생산의 중심지는 농촌으로 옮겨갔습니다. 그러나 11세기부터 이러한 상황이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는데, 역사학계에서는 이를 '도시 르네상스(Urban Renaissance)'라고 부릅니다.

봉건 사회와 중세 도시의 관계

중세 사회의 농촌화가 곧 도시의 소멸을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사회 전체에서 도시가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었고, 고대 로마 시대에 수행하던 기능과 비교해 도시의 성격 자체가 변했을 뿐입니다.

중세 도시, 즉 '부르크(burg)'는 11세기까지 일종의 장원 세계의 연장선에 있었습니다. 도시가 영주의 지배 아래 있는 토지에 위치했기 때문에 영주의 권력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도시에는 귀족, 왕, 주교, 상인들이 거주하여 정치적·종교적 권력이 집중되는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도시의 중심에는 시장과 교회가 자리했습니다.

영주들은 자신이 지배하는 토지에서 나온 농업 잉여 생산물을 도시로 보내 판매함으로써 도시에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아울러 주로 세금 징수를 통해 도시 주민들과 종속 관계를 형성했습니다.

중세 유럽의 도시 르네상스: 봉건 사회 속에서 피어난 도시의 부흥
프랑스 중세 도시 카르카손의 성벽

도시 르네상스의 배경: 무역의 확장

11세기부터 십자군 전쟁과 농업 잉여 생산물의 축적을 계기로 무역이 본격적으로 확장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잉여 생산물은 쟁기의 개량, 가축을 쟁기에 부리는 새로운 방식, 윤작 재배 등 농업 분야의 기술 혁신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십자군 전쟁으로 열린 동방과의 교역과 잉여 생산물의 교환은 점차 봉건 세계에서 도시의 위상을 높여갔습니다.

정기시장과 부르주아의 등장

상거래를 위해 정기시장이 만들어졌는데, 그중에서도 오늘날 프랑스 지역의 샹파뉴와 브리의 시장이 특히 유명했습니다. 도시들은 요새화되어 있고 교역로 인근에 위치해 있어 안전한 장소로 여겨졌으며, 특히 상거래에 필요한 은행 업무를 유지하기에 적합했습니다. 부르크 안에서는 상인 계급이 형성되어 부를 축적하게 되었고, 여기서 '부르주아'라는 새로운 계층이 탄생했습니다.

수공업 조합(길드)의 위계 질서

한편 장인 집단도 형성되어 정기시장에서 자신들의 생산물을 판매했습니다. 이들은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로 묶은 조직인 '수공업 조합(길드)'으로 체계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조합 내부에는 엄격한 위계가 존재했는데, 최상위에 마스터(도제장), 그 아래에 직공, 마지막으로 견습생이 있었습니다. 작업 방식과 제품을 표준화하고 생산 전통을 확립하려는 규칙이 생산 기법에 적용되었으며, 이러한 규칙의 준수를 감독하는 것이 마스터의 역할이었습니다.

도시의 성장과 위생 문제

경제적 중요성이 커짐에 따라 도시는 빠르게 확장되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면서 도시의 경계를 표시하던 성벽도 점점 넓혀졌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장은 당시 기준으로 상당한 인구 밀집을 초래했습니다. 파리는 이 시기 약 10만 명의 인구를 보유했는데, 다른 도시들이 대부분 2만 명을 넘지 못한 것을 감안하면 매우 큰 숫자였습니다.

문제는 위생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기본적인 위생 시설이 존재하지 않아 도시는 전염병이 번식하기 좋은 환경이 되었습니다. 14세기에 바로 이런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페스트균(Yersinia pestis)에 감염된 벼룩이 설치류와 동물 가죽을 통해 동방에서 유럽 도시로 운반된 것입니다. 세균에 감염된 벼룩이 사람을 물면腺페스트(임파선 페스트)를 옮깁니다. 유럽 도시의 불결한 환경 속에서 페스트는 대유행병으로 번져 유럽 인구의 약 3분의 1을 몰살시켰습니다.

중세 유럽의 도시 르네상스: 봉건 사회 속에서 피어난 도시의 부흥
스페인의 중세 도시 세고비아를 그린 그림

흑사병 이후: 코뮌과 도시의 자율성

그럼에도 도시들은 '흑사병'이라고도 불리는 이 전염병을 이겨내고 살아남았습니다. 부르크를 정치적으로 통치하던 도시 귀족층(파트리키아트)은 도시 발전과 함께 세력을 강화했고, 봉건 영주로부터 점점 더 자율성을 확보해 갔습니다. '코뮌(commune)'은 바로 이렇게 자유를 얻은 도시들을 가리키며, 농촌 귀족 영주에 대한 종속 관계와는 전혀 다른 원리를 바탕으로 조직되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시간이 갈수록 커져 도시 부르주아지와 농촌 귀족 간의 대립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갈등은 근대 말기에야 비로소 해소되었습니다. 그 무렵에는 부르주아지가 이미 막대한 경제력을 축적하여 정치적으로도 귀족에게 우위를 점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 이미지 출처: Palazzo Pubbli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