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도모르(Holodomor)는 1932년부터 1933년 사이, 소련의 강제 집단화 정책으로 인해 우크라이나 농촌 지역 주민 수백만 명이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은 비극을 가리킨다. '홀로도모르'라는 단어는 우크라이나어로 '굶주림에 의한 죽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당시 소련의 지배자였던 이오시프 스탈린(1878~1953)이 강요한 농업 생산 집단화 정책과 직결되어 있다.
정확한 사망자 수는 소련 당국의 철저한 정보 통제로 인해 파악하기 어렵다.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150만 명에서 700만 명 사이의 우크라이나인이 이 시기 기근으로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이 기근을 단순한 재난이 아니라, 스탈린 정권이 체제에 대한 복종을 강요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조작한 '집단살해(제노사이드)'로 규정한다.
왜 '집단살해'인가
'집단살해'라는 용어가 사용되는 이유는 이 사건이 자연발생한 기근이 아니라 '인위적 기근'이었기 때문이다. 역사학자들은 식량 접근을 의도적으로 차단하는 것이 권력을 강제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굶주림 자체가 정치적 억압의 도구로 사용된 것이다.
홀로도모르, 우크라이나의 홀로코스트
1928년 스탈린이 소련의 권력을 장악하면서 정권은 더욱 경직되었고, 반대파에 대한 박해와 탄압이 이어졌다. 이후 농업 집단화 물결이 전개되었다.
그 결과, 모스크바 중앙집권적 권력에 대해 전통적으로 강한 저항 의식을 지녀온 우크라이나 지역은 스탈린 정부의 가혹한 제재의 표적이 되었다.
농촌에서는 이른바 쿨라크(kulaks)라 불리던 부농 계층이 국가에 의한 재산 몰수를 거부했다. 항의의 표시로 곡물 창고와 재산에 방화를 저지르거나 가축을 죽이고 수확물을 파괴하는 사보타주 사례가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스탈린 정부에 대한 일련의 봉기와 무장 항쟁이 발생했고, 식량 생산량이 급감하면서 식량 부족 사태가 시작되었다.
스탈린은 동료에게 보낸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크라이나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크라이나를 잃을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후 소련 정부가 강제한 집단화 과정은 한층 강화되었다. 남아 있던 거의 모든 곡물 생산량이 징발되었고, 가구별 식량 비축은 금지되었으며, 우크라이나 영토 전역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었다.
소위 '다섯 개의 이삭 법'이 시행되어, 국영 집단농장 콜호즈(kolkhoz)에서 식량을 훔친 사람들은 총살형에 처해질 수 있었다.
이렇듯 1932년 말에는 굶주림이 거의 전체 인구를 덮쳤다. 기근만이 아니라 영양실조에서 비롯된 각종 질병이 확산되면서 수천 가족이 몰살당했다.
1933년, 홀로도모르의 절정
극심한 식량 접근 제한에도 불구하고, 소련 정부는 여전히 우크라이나 농민들의 저항을 감지하고 있었다. 결국 1933년 1월, 정부는 곡물뿐 아니라 모든 식량의 완전 몰수를 명령했다.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이 담긴 문서들에는 길거리에 널린 시체, 굶주림으로 정신을 잃은 사람들, 그리고 극한의 상황에서 벌어진 식인 사건까지 기록되어 있다.

체제 순응과 홀로도모르의 종말
1933년이 진행되면서 우크라이나의 저항 거점들은 차례로 소멸되었다. 스탈린 정권이 초래한 기근의 생존자들은 교육과 훈련을 받은 뒤 국가의 집단 농지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소련의 생산 모델에 대한 순응이 이루어지면서 정부가 정한 생산 목표가 달성되었고, 국가는 제재를 완화했으며, 그 결과 기근도 잦아들었다.

오늘날에도 여러 역사학자들이 홀로도모르 당시 우크라이나에서 기근으로 사망한 정확한 숫자를 추정하려 노력하고 있다. 확실한 것은 이 사건이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집단살해 중 하나로 기록되며, 오늘날까지 깊은 상처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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