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티의 독립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최초로 성공한 노예 반란 기반의 독립 운동으로, 이 나라에서 노예제가 폐지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아메리카 최초의 독립국, 아이티
프랑스 본국으로부터의 아이티 독립은 1804년에 이루어졌습니다. 앤틸리스 제도의 섬에서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전투 끝에, 반란을 일으킨 노예들이 백인 인구를 몰살시키면서 독립이 성취되었습니다. 아이티는 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독립국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경 안에서 노예제를 폐지한 최초의 나라이기도 했습니다.
반란군들은 자유·평등·박애의 이상을 받아들였고, 독립 투쟁 과정에서 드러낸 급진성 덕분에 지도자들은 '흑인 자코뱅(Black Jacobins)'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는 프랑스 혁명기인 1792년부터 1795년까지 국민공회를 주도했던 세력을 연상시키는 명칭입니다.
식민지 시대의 산토도밍고 섬
산토도밍고라고 불린 이 지역은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도착한 직후 유럽인들에게 정복당했습니다. 제노바 출신 탐험가 콜럼버스는 이 섬에 '히스파니올라'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원주민 인구는 섬에서 몰살당했고, 16세기에는 식민지 시장에 공급할 열대 작물, 특히 설탕 생산을 위해 노예 노동이 도입되었습니다.
섬의 서부 지역은 17세기 말부터 프랑스가 점령하기 시작했으며, 1697년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 체결된 조약으로 프랑스의 소유권이 확정되었습니다. 이후 이곳은 프랑스 식민지 경영의 핵심 부의 원천이 되어 다양한 상품, 특히 설탕을 생산했습니다. 산토도밍고는 독립 운동이 일어나기 전 수십 년간 세계 교역용 설탕의 약 3분의 2를 생산했습니다.
이렇게 막대한 양의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약 50만 명에 달하는 노예가 섬의 플랜테이션에서 동원되었습니다. 소유주와 관리인으로 구성된 백인 인구는 3만 5천 명에 불과했습니다. 또한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를 얻고 경우에 따라 부를 축적하기까지 한 물라토와 해방 노예로 이루어진 소규모 집단도 존재했습니다.
노예 반란의 시작
나라의 독립으로 이어진 반란은 1791년에 시작되었습니다. 새로운 프랑스 정부가 식민지의 노예제를 폐지했다는 소식이 노예들 사이에 빠르게 퍼지면서였습니다. 농장과 작물의 방치, 백인 농장주에 대한 공격이 섬 전체로 확산되었습니다. 많은 백인들이 노예에게 가한 열악한 노동 조건과 학대에 대한 대가로 살해당했습니다.
가장 반항적인 노예들은 잔혹한 처형을 당했습니다. 머리만 밖으로 내민 채 땅속에 서서 묻혀 얼굴이 독수리와 벌레에게 파먹히며 천천히 죽어가는 형벌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백인에 대한 보복은 그들이 노예에게 가한 가혹행위에 비례하는 것이었습니다.
투생 루베르튀르의 등장
반란은 1794년, 투생 드 바레(후일 투생 루베르튀르)가 독립과 노예제 폐지를 위한 투쟁의 지휘를 맡으면서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투생은 교양 있는 프랑스어를 말하고 읽을 줄 알던 교육받은 노예였습니다. 젊은 시절 그는 식민지 노예 노동력 착취 실태를 다룬 아베 레날의 저서와, 갈리아 정복 전쟁을 다룬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저서를 접했습니다. 두 책은 각각 그에게 영향을 미쳤는데, 전자는 노예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후자는 군사 전술에 대한 이해를 길러주었습니다.
이러한 역량은 1801년에 시작된 투생의 통치에서 빛을 발했습니다. 그는 섬 전체에 헌법을 공포하여 노예제를 폐지하고 모든 주민의 평등을 선언했습니다. 투생은 군대의 주요 지휘관으로 전직 노예 출신인 데살린, 앙리 크리스토프, 모레다스, 페티옹, 모이즈를 두었습니다. 통치 기간 동안 투생은 새 국가의 통제 아래 농장과 제분소의 운영을 백인들의 손에 맡겼고, 섬 경제의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해방된 노예들을 강제 노동에 종사시켰습니다. 그는 해방 노예들이 스스로 농장을 운영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기에 이 조치가 불가피하다고 여겼습니다.
투생은 자율성을 유지하면서도 섬을 프랑스와 긴밀한 관계로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동맹에 대한 신념은 그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여러 차례 서신을 보내며 두 정부의 관계를 좁히려는 노력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보나파르트는 동맹에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식민지의 노예제 폐지를 철회할 의도까지 품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개입과 피비린내 나는 전쟁
1801년 보나파르트는 매부 르클레르를 2만 5천 명의 병력과 함께 산토도밍고에 파견했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독립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양측에서 잔혹 행위가 벌어졌지만, 결국 백인들은 섬에서 완전히 축출되었습니다. 그러나 1802년 프랑스군은 투생을 체포하는 데 성공했고, 그는 프랑스로 압송되어 1803년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투생의 뒤를 이어 데살린, 앙리 크리스토프, 모레다스, 페티옹 등 다른 흑인 자코뱅들이 전투를 지휘했고, 1803년 말 프랑스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나라의 이름은 아이티로 바뀌었고, 독립이 최종적으로 선언되었습니다. 데살린은 1804년 10월 나라의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독립 이후의 고립과 몰락
그러나 전쟁은 섬의 경제 기반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한때 번성했던 사탕수수 재배는 붕괴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아이티는 세계 시장에서 단절되어 다른 나라들과 식민지들로부터 고립된 존재가 되었고, 경제는 자급자족 생산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했습니다. 노예 반란이 다른 식민지로 번질까 두려웠던 것도 고립에 한몫했습니다. 당시 아메리카 지역 엘리트 대부분이 노예 소유주였기 때문입니다.
노예제라는 제도로부터의 해방을 상징하고, 아메리카 대륙 최초로 식민지 종주국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위업을 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티는 이후 국가를 비참함으로 몰아넣는 긴 침체의 과정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그 상황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 이미지 출처: rook76, Shuttersto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