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사유 궁전은 루이 14세 통치 기간에 본격적인 건축이 시작되었으며, 프랑스 절대왕정 시기 군주들의 권력과 부를 상징하는 건축물로 자리 잡았습니다.

베르사유 궁전은 현재의 모습으로 루이 14세 재위 기간인 1661년부터 건설되기 시작했습니다. 루이 14세는 1661년부터 1715년까지 프랑스를 통치했으며 '태양왕'이라는 별칭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베르사유 궁전은 절대왕정 프랑스에서 군주의 권력을 보여주는 가장 큰 상징일 뿐만 아니라, 왕과 귀족들이 누리던 사치스러운 생활상을 대표하는 아이콘이기도 합니다. 이 궁전은 1682년부터 1789년까지 프랑스 왕가의 거처로 사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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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유 궁전의 건축 역사
베르사유 궁전의 건축은 절대왕정 시대 프랑스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였던 루이 14세의 명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이 궁전을 '샤토 드 베르사유(Château de Versailles)'라고 부르며, 직역하면 '베르사유 성'이라는 뜻입니다. 다만 흥미로운 점은 르네상스 시기 프랑스에서 '샤토(château)'라는 단어는 주로 시골 지역에 위치한 궁전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도시 중심지에 지어진 궁전에는 '팔레(palais)'라는 표현이 쓰였습니다.
베르사유 궁전의 시작은 1610년부터 1643년까지 프랑스를 다스린 루이 13세가 사용하던 시골 사냥 오두막이었습니다. 루이 13세는 파리 외곽에 위치한 베르사유 지역으로 사냥을 떠나면서 이곳의 숲에 매료되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이곳을 더욱 좋아하게 되어 1623년 작은 별장을 짓도록 명령했습니다.
얼마 후인 1631년, 루이 13세는 별장을 다시 짓도록 명했고, 공사는 1631년에 착공하여 1634년에 완공되었습니다. 이번 개축 작업은 현재의 궁전이 자리 잡은 기반이 되었으며, 단순한 별장이 작은 궁전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베르사유 궁전의 역사는 루이 14세가 프랑스 왕으로 즉위하면서 근본적으로 바뀌게 됩니다. 루이 14세는 1643년부터 1715년까지 프랑스를 통치했으며, 스스로를 '태양왕'이라 칭한 그는 절대군주의 권력을 구체화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추구했던 극도로 사치스러운 생활 방식의 상징이 바로 베르사유 궁전의 건설입니다.
루이 14세 시대의 베르사유 궁전

1643년부터 1715년까지 프랑스를 통치한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전 건설을 명한 인물입니다.
루이 14세는 수상이자 정신적 지도자였던 마자랭 추기경이 사망한 직후인 1661년, 베르사유 궁전의 증축을 결정합니다. 그의 목표는 궁전을 더욱 웅장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건축가 루이 르보(Louis Le Vau)에게 궁전 확장 설계를 맡겼습니다. 루이 14세의 재위 동안 베르사유는 거대하고 화려한 궁전으로 탈바꿈하였고, 프랑스 행정의 중심지이자 귀족과 프랑스 궁정의 파티 장소가 되었습니다.
베르사유의 확장 공사는 루이 14세의 전체 재위 기간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그가 서거한 후에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거울의 방(Galerie des Glaces), 그랑 트리아농(Grand Trianon), 궁전의 북관과 남관, 왕립 예배당 등이 세워졌습니다. 궁전 자체뿐만 아니라 궁전 뒤편에는 방대한 규모의 정원도 조성되었습니다.
정원 설계를 위해 루이 14세는 앙드레 르노트르(André Le Nôtre)를 고용했습니다. 이 정원 공사는 수십 년에 걸쳐 진행되어 루이 16세 대에 이르러서야 완성되었습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곳으로는 오렌지원(Orangerie)과 그랑 운하(Grand Canal)가 있습니다.

베르사유 궁전 뒤편에 조성된 정원 중 하나인 오렌지원.
1682년,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전을 프랑스 궁정과 정부의 소재지로 선포했습니다. 이에 따라 프랑스의 귀족층과 행정 기구는 파리를 떠나 베르사유로 이동했습니다. 베르사유 궁전은 1789년까지 프랑스 왕실의 소재지 역할을 했으며,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면서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파리로 강제 이송되면서 그 역사에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역사 속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 – 프로이센-프랑스 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의 평화 조약이 체결된 곳.*
1833년, 루이 필리프 1세의 명에 따라 베르사유 궁전은 '프랑스 역사의 모든 영광'을 기리는 박물관으로 탈바꿈했습니다. 박물관으로서 중세 시대부터 19세기에 이르는 프랑스 역사 유물들을 전시하는 장소가 되었지만, 동시에 프랑스 정부의 중요한 행사 장소로도 계속 활용되었습니다.
1871년 초 파리 코뮌 기간에는 파리에서 피난 온 프랑스 국회의원들이 베르사유 궁전에 머물렀습니다. 몇 달 뒤에는 프랑스와 프로이센 대표단이 거울의 방에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종식시키는 협정에 서명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거울의 방에서 각국 외교 대표단이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하는 무대가 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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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베르사유 궁전은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매년 수백만 명의 방문객이 찾는 프랑스 최고의 관광 명소 중 하나입니다. 1999년에는 강력한 폭풍이 궁전을 덮쳐 대규모 피해를 입히기도 했습니다. 이 폭풍으로 약 1만 그루의 나무가 피해를 입었으며, 이는 프랑스 정부에 2억 5천만 프랑의 손실로 이어졌습니다.
궁전은 매주 6일간 개방되며, 월요일만 휴무입니다. 반면 정원과 공원은 매일 열려 있습니다. 궁전 관람은 유료이지만, 일정 조건을 충족하는 방문객은 무료 입장을 신청할 수 있습니다.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

사진 속 그랑 운하와 배경의 베르사유 궁전 모습.**
웅장한 궁전 건물만큼이나 베르사유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외곽 지역에 조성된 아름답고 광활한 정원입니다. 베르사유 단지의 정원 일부는 거울의 방에서 바로 내다볼 수 있습니다. 정원 조성은 루이 14세의 명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그 규모와 완성도는 궁전 건물 자체 못지않게 중요하게 평가됩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루이 14세는 앙드레 르노트르를 정원 조성의 총괄로 임명했습니다. 정원 개발에는 막대한 노력이 필요했는데, 지반을 평탄하게 하기 위해 베르사유에서 엄청난 양의 흙을 실어 나르는 작업부터 해야 했습니다. 정원 외에도 수백 개의 분수가 세워졌으며, 프랑스 각지에서 나무들이 베르사유로 운반되어 심어졌습니다.
베르사유 정원 단지 전체에는 화단, 분수, 수목원, 운하가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물의 화단(Parterre d'Eau), 오렌지원, 용의 분수(Fontaine du Dragon), 그랑 운하, 세 분수의 숲 등이 있습니다.
베르사유 궁전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들
베르사유 궁전은 건물 자체와 정원 모두 그 규모가 어마어마합니다. 이 궁전에 대해 알아두면 좋은 정보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정원을 포함한 궁전 단지 전체 면적은 약 67,000m²에 달합니다.
프랑스 역사와 관련된 약 60,000점의 소장품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약 700개의 방, 2,000개의 창문, 67개의 계단, 1,000개가 넘는 벽난로가 있습니다.
건축 구조에 관한 정보 외에도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사실들이 있습니다.
거울의 방은 1678년부터 1684년 사이에 건설되었으며, 총 357개의 거울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베르사유 궁전은 두 번의 전쟁, 즉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1년)과 제1차 세계대전(1919년)의 평화 조약 체결 장소가 되었습니다.
1783년에는 파리 조약이 베르사유 궁전에서 체결되어, 영국이 미국의 독립을 공식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프랑스 혁명 당시 베르사유 궁전은 습격을 받았고,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파리로 강제 이송되었습니다.
전쟁 회랑(Galerie des Batailles)에는 클로비스 1세부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까지의 프랑스 역사를 담은 33점의 회화작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전쟁 회랑에는 전투에서 전사한 위대한 프랑스 장교들을 기리는 80개의 흉상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1999년에는 시속 200km를 넘는 강풍을 동반한 대형 폭풍이 궁전을 덮쳐, 궁전 내 20만 그루의 나무 중 1만 그루가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미지 출처: Mister_Knight, Shutterstock
**이미지 출처: Bigmagic, Shuttersto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