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무시무시한 종교재판관, 토마스 데 토르케마다(Tomás de Torquemada)

무시무시한 종교재판관, 토르케마다

글: 라이너 소우자(Rainer Sousa)

중세 후기부터 근대에 이르는 시기, 가톨릭 종교재판(Inquisition)은 교회가 가톨릭의 지배 체제를 위협하는 이들에 맞서기 위해 동원한 강력한 수단이었다. 재판 절차를 통해 사람들은 체포되고, 심문받고, 처벌되었으며, 극단적인 경우에는 화형대에 오르며 목숨을 잃었다. 가톨릭의 입장에서 이러한 박해는 이단, 유대교, 마녀술이 유럽의 기독교 질서를 무너뜨리지 못하도록 막기 위한 필수적인 장치로 여겨졌다.

고문은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불가피한 수단으로 정당화되었다. 심문 대상자가 자신이 저지른 죄의 본질을 시인하지 않을 때 가장 흔히 내세워진 명분은 '악마에게 홀렸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문은 피고인의 유죄 혹은 무죄를 입증하는 방식으로 활용되었다. 종교재판소의 고문이 공포를 조성하고 대중을 위협하는 도구로 기능하기도 했지만, 그것이 유일한 목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종교재판 역사상 가장 두려움의 대상이 된 인물 중 하나가 바로 스페인 출신 도미니코회 수사 토마스 데 토르케마다(Tomás de Torquemada)였다. 교황 인노첸시오 8세에 의해 종교재판관으로 임명되고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의 깊은 신임을 얻은 그는 중혼자, 고리대금업자, 유대인, 동성애자, 마녀, 이단자들을 향한 무자비한 사냥을 벌였다. 그의 혹독한 집무 덕분에 그의 악명은 스페인 전역은 물론 바티칸의 귀에까지 닿게 되었다.

보통 빈약한 근거의 고발만으로도 조사 대상자들은 체포되어 종교재판소의 지하 감옥으로 끌려가 혹독한 심문을 받아야 했다. 채찍질과 고문이 이어지는 동안 토르케마다는 기도문을 읊조리며 시간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피심자들은 손톱을 뽑히고, 달군 쇠붙이로 피부에 낙인이 찍히며, 손가락이 찔리는 참혹한 고통을 겪었다. 마녀로 고발된 여성들은 옷을 벗겨진 채 악마의 상징이 새겨진 문신이 있는지 일일이 색출당했다.

평생을 이런 활동에 바친 끝에 토르케마다는 당대 종교 지도자들의 의심과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추산에 따르면 그의 조사 방식으로 약 1만 명이 화형에 처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교회가 여러 차례 온건함을 요청했음에도 이를 무시하던 그는 결국 직무에서 물러나야 했으며, 4년 뒤인 1494년 아빌라(Ávila) 지방의 한 수도원 회랑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