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탕가는 끝내 협조를 거부했고, 상황은 다그 함마르셸드(Dag Hammarskjöld)의 죽음으로 더욱 극단적으로 치닫습니다. 유엔 사무총장 함마르셸드는 응콤베(Tschombé)와의 협상을 위해 카탕가로 향하던 중 수수께끼의 비행기 추락 사고로 생명을 잃었습니다. 크게 흔들린 유엔의 권위를 어떻게 해서든 회복해야 했기에, '파란 헬멧' 부대는 카탕가에 대한 군사 행동에 참여할 권한을 부여받습니다. 결국 1962년 12월, 카탕가의 분리 독립은 막을 내렸고 응콤베는 국외로 추방됩니다.
루무바 이후에도 계속된 혼란
루무바(Lumumba)의 최후가 콩고의 극단주의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라 믿었던 이들은 크게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루무바를 권력의 자리로 이끌었던 조건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고, 지난 몇 년간의 봉기들로 인해 오히려 한층 악화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실업률은 여전히 상승세를 이어갔으며, 농촌 지역에는 어떠한 개선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콩고에는 이제 자체적인 엘리트층이 등장했는데, 그것도 대단한 엘리트였습니다. 과도한 보수를 받아가는 군인과 정치인, 무능하고 사치스러운 공무원들이 뒤섞인 기이한 집합체였던 것입니다.
불만과 소요는 날로 커져갔지만 정부는 뾰족한 대책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군부와 우파 정치인들의 압박 속에서 아두라(Adoula)는 스탠리빌(Stanleyville) 출신 핵심 인사들을 요직에서 축출했고, 1962년 1월에는 기젱가(Gizenga)가 체포됩니다. 다가오는 위기의 징후가 뚜렷했음에도 아두라는 더 이상 곁에 조언자가 없는 상태에서, 협박을 퍼붓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경제 위기의 타격이 특히 컸거나 독립 전 M.N.C.(콩고민족운동)의 거점이었던 지역들에서는 소요가 점차 무정부 상태로 변해갔습니다. 콩고 동부와 레오폴드빌(Léopoldville) 인근에서는 게릴라 부대들이 활동을 개시했습니다. 이러한 심각한 위협에 중국의 콩고 개입설까지 더해지면서 레오폴드빌은 물론 그 너머까지 커다란 불안감이 번져나갔습니다. 이에 미국과 벨기에는 콩고 정부군에 대한 원조를 확대했고, 응콤베는 1964년 6월 망명지에서 돌아와 아두라의 자리를 대신하게 됩니다. 그와 함께 들어온 것은 백인 용병 부대였으며, 카탕가를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었던 세력들로부터 재정적 후원 역시 확보했습니다.
응콤베의 귀환과 스탠리빌의 함락
그토록 강대한 세력 앞에서 게릴라들에게 승산은 없었습니다. 스탠리빌에는 혁명 정권이 수립되었지만, 지도자들은 본질적으로 지역에 머물러 있는 봉기를 통제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상황은 벨기에 낙하산 부대가 억류되어 있던 백인 인질들을 구출하기 위해 스탠리빌에 투입되면서 절정에 이릅니다.
이 작전을 계기로 응콤베의 군대는 도시를 장악할 수 있었고, 이후 봉기를 완전히 진압했습니다. 이 목표가 달성되자 응콤베의 역할은 끝났습니다. 1965년 11월, 이제 장군이 된 모부투(Mobutu)는 군이 다시 한번 권력을 장악한다고 선언합니다.
모부투의 집권과 국가 재건
모부투가 이렇게 선택한 데에는 콩고가 내전으로 치닫는 것을 막고,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의 노선과 조화를 이루는 정책을 채택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콩고 엘리트층이 저질러 온 가장 극심한 폐해를 종식시키며, 인근 국가들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광산연합(Union Minière)과 좀 더 유리한 조건의 협정을 체결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국가 구조 자체에 일어난 변화도 자리하고 있습니다.
1960년대 말이 되자 독립 초기의 무능한 엘리트층은 물러나고, 더 잘 훈련되고 '발전된' 관료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경제에서 콩고인의 참여 비중은 커졌고, 도시의 생활 환경 역시 개선되었습니다. 다만 국가의 안정이 이러한 조건들이 지속되는가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여전히 불투명한 콩고의 미래
그럼에도 콩고의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합니다. 더 안정적인 정치 체제를 갖춘 아프리카 국가들조차 하룻밤 사이에 심각한 위기가 터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이지리아가 바로 그러한 사례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