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칠레를 지배한 독재자의 생애와 유산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Pinochet)는 칠레 육군에서 성공적인 군인 경력을 쌓은 인물이다.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대통령과 가까운 사이였던 그는 1973년 군사 쿠데타가 실행되기 불과 이틀 전에야 쿠데타에 가담했다. 이후 곧바로 칠레의 권력을 장악한 피노체트는 쿠데타가 일어난 해인 1973년부터 독재정권이 막을 내린 1990년까지 무려 17년간 칠레의 독재자로 군림했다.

피노체트가 이끈 독재정권은 모든 반대 세력에 대한 폭력적 탄압으로 특징지어진다. 정부 주도로 약 3,000명이 살해되었고, 약 4만 명이 고문을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98년 체포되었으며, 이후 조사에서 피노체트가 칠레 국가 재정을 횡령했을 뿐만 아니라 코카인 밀매에까지 연루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출생과 군인 경력

아우구스토 호세 라몬 피노체트 우가르테(Augusto José Ramón Pinochet Ugarte)는 1915년 11월 25일 칠레 발파라이소(Valparaíso)에서 태어났다. 상류 중산층 부부였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와 아벨리나 우가르테(Avelina Ugarte) 사이의 첫째 아들이었다. 가정의 여유로운 경제 상황 덕분에 피노체트는 어린 시절 내내 고향의 좋은 학교에서 교육받을 수 있었다. 17세 때 그는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로 이주하여 베르나르도 오히긴스 육군사관학교(Escuela Militar del Libertador Bernardo O'Higgins)에 입교했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칠레를 지배한 독재자의 생애와 유산

이 학교 입학은 피노체트의 평생 직업인 군인의 길을 결정짓는 계기가 되었다. 군 복무 기간 동안 그는 콘셉시온, 산베르나르도, 이키케, 피사과 등 여러 지역에 배치되었다. 또한 에콰도르에서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으며, 이후 수도에 위치한 전쟁대학(War Academy)에서 지정학 교수직을 역임했다.

피노체트의 군인 경력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1969년에는 준장으로, 1971년에는 소장으로 승진했고, 1973년에는 칠레 육군의 최고 계급인 육군 총사령관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는 두각을 드러내는 것을 피했다. 아옌데 정부 시절까지의 그의 군 경력은 많은 이들에게 '특별할 것 없는' 것으로 평가된다. 중요한 자리를 적극적으로 추구하지 않았고, 비록 동의하지 않더라도 상급자의 명령을 맹목적으로 따랐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피노체트는 마리아 루시아 히리아르트 로드리게스(María Lucía Hiriart Rodríguez)를 만나 1943년 1월 결혼했으며, 슬하에 다섯 자녀 — 이네스 루시아, 아우구스토, 마리아 베로니카, 마르코 안토니오, 자클린 — 를 두었다.

군사 쿠데타 참여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삶에서 중요한 전환점은 바로 1973년 9월 11일의 군사 쿠데타 참여였다. 이 쿠데타는 산티아고에 위치한 라 모네다 궁(La Moneda Palace) 공격을 통해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을 축출하는 것을 목표로 진행되었다. 쿠데타 과정에서 아옌데 대통령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피노체트는 칠레의 통치자가 되었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칠레를 지배한 독재자의 생애와 유산

흥미로운 점은 9월 11일 당일 작전을 조율했음에도 불구하고, 피노체트는 쿠데타의 기획자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는 아옌데에 대한 음모에 단 며칠 전에야 합류했다. 쿠데타가 실패할 경우 자신과 가족의 목숨, 혹은 군 경력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현직 대통령에게 충성 서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피노체트는 1973년 9월 9일 쿠데타 음모에 가담하게 된다.

1970년 살바도르 아옌데의 선출 당시 칠레는 극심하게 분열된 국가였다. 사회주의자였던 아옌데 대통령은 사회당과 공산당으로 구성된 연합 정부를 이끌었다. 미국의 지원을 받는 우파와 극우 세력이 초래한 정치 위기 속에서 아옌데의 대통령직은 순탄하지 않았다.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 시절, 피노체트는 산티아고 수비대 사령관을 맡았고 육군참모총장으로도 임명되었다. 이는 피노체트가 대통령의 신뢰를 받고 있었다는 두 가지 신호였다. 마침내 1973년 피노체트는 칠레 육군 최고 계급에 올랐고, 정부는 그가 군을 통제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피노체트는 아옌데에 대한 군사 행동 전날에야 쿠데타에 합류했다. 1973년 9월 11일, 군사 작전은 새벽부터 시작되었다. 오전 7시 30분경 이미 군의 움직임이 보고되었다. 연안 도시 발파라이소에서는 해군이 반란을 일으켰고, 산티아고에서는 병력이 거리로 나왔다.

쿠데타의 결과로 살바도르 아옌데는 자결했다. 그는 쿠데타 세력에게 산 채로 항복하는 것을 거부하고 라 모네다 궁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쿠데타 이후 피노체트, 메리노 제독(Merino), 세사르 멘도사(César Mendoza), 구스타보 리(Gustavo Leigh) 장군으로 구성된 군사 정권(junta)이 수립되었다. 이 정권은 네 사람 간의 권력 순환 방식으로 칠레를 통치하기로 했으나, 곧 피노체트가 국가 전체를 장악하게 된다.

칠레 독재정권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는 약 17년간 칠레의 독재자로 있었으며, 1973년부터 1990년까지 극도의 권위주의로 국가를 통치했다. 칠레 독재정권은 남미에서 가장 폭력적인 정권 중 하나였으며, 피노체트는 정부 내부의 적들과 시민 사회의 어떤 반대 세력도 폭력적으로 탄압했다. 칠레 사회 전반에 걸쳐 실질적인 숙청이 자행되었다.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그리고 민주주의 원칙을 옹호하는 모든 이들이 정부의 폭력에 시달렸다.

거의 20년에 달하는 독재 기간 동안 3천 명 이상의 사망자와 4만 명에 달하는 고문 피해자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람들이 납치되고, 고문당하고, 실종되는 사건들은 피노체트 독재 기간 내내 빈번하게 일어났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칠레를 지배한 독재자의 생애와 유산

칠레의 독재자는 국가 안보 독트린(National Security Doctrine)의 요소들을 수출했으며, 칠레 내부에 타도해야 할 '내부의 적'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견지했다. 이를 위해 피노체트는 디나(DINA, Dirección de Inteligencia Nacional)로 알려진 비밀경찰 조직을 창설했다. 외교관 에랄도 무뇨스(Heraldo Muñoz)에 따르면, 피노체트의 태도는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 모든 이를 상대로 한 '전쟁'과 같은 것이었다.

독재 기간 동안 피노체트는 칠레에서 심오한 경제 개혁을 단행하여, 미국 시카고에서 유학한 칠레 출신 경제학자들이 주도하는 자유주의적 개방을 추진했다. 이른바 '시카고 보이즈(Chicago Boys)'가 수행한 이 개혁은 칠레의 사회 불평등을 심화시켰고, 연금 등 사회 서비스를 취약하게 만들었다.

독재정권의 종말

1980년대부터 칠레 경제가 하락세를 보이면서 피노체트에 반대하는 시위가 힘을 얻기 시작했다. 더불어 칠레는 미국으로부터 민주화 요구를 받는 압박에 직면하게 되었다. 피노체트 본인이 승인한 1980년 헌법에는 1989년 새로운 지도자를 선출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민주 세력은 이를 계기로 결집하여 칠레 독재정권의 종식을 요구했다. 이에 피노체트는 1988년 국민투표(plebiscite)를 실시하여 국민이 자신의 집권 연속 여부를 결정하도록 했다. 반대 캠페인은 1988년 내내 힘을 얻었고, 그해 말 국민투표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 유효표의 56%가 피노체트 정권의 연속 반대에 투표했다;
  • 유효표의 44%가 피노체트 정권의 연속 찬성에 투표했다.

다음 해 대통령 선거에서 파트리시오 아일윈(Patricio Aylwin)이 새 칠레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파트리시오는 1990년 취임하며 피노체트 독재정권에 종지부를 찍었다.

말년의 세월

대통령직에서 물러난다고 해서 피노체트가 칠레에서的影响力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칠레 육군 총사령관이자 종신상원의원으로서 국가 권력 최고위층에서 여전히 영향력 있는 인물로 남아 있었다. 첫 번째 직책은 건강 악화로 인해 1998년에 물러나게 된다.

같은 해 10월 16일, 수술 후 회복 중이던 피노체트는 런던에서 체포되었다. 이 체포는 인권 침해 혐의에 대해 스페인 판사가 발부한 국제 체포영장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런던에서 가택연금 상태에 놓였고, 스페인에서 재판을 받기에 정신적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칠레로 송환되었다.

피노체트에 대한 조사에서는 부패의 증거가 발견되었다. 그는 칠레 정부의 자금을 횡령하여 미국의 비밀 은행 계좌로 송금했으며, 이러한 비밀 계좌에 총 2,700만 달러를 보유하고 있었다. 추가 조사에서는 그가 칠레 육군 요원들이 생산한 코카인 판매로 부를 축적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피노체트가 판매한 코카인은 유럽과 미국 시장으로 운송되었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는 2006년 12월 10일, 91세의 나이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주석

|1| MUÑOZ, Heraldo. The dictator's shadow: political memories of Chile under Pinochet. Rio de Janeiro: Zahar, 2010, p. 64.

이미지 출처

[1] FGV/CPDOC

[2] byvalet and Shutterstock

[3] Yasemin Olgunoz Berber and Shuttersto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