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미국은 어느 나라보다 먼저 전투기에 대한 연구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터진 전쟁은 미국의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는 것이었고, 미군은 충분히 장비를 갖추지 못한 채 전장에 내던져졌다.
한반도의 분단, 그 시작
1945년까지 일본의 식민 지배 아래 있던 한반도는 종전과 함께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과 북으로 갈라졌다. 남부는 미군이, 북부는 소련군이 각각 점령하며 관리하게 되었다.
원래 양측 지역은 빠른 시일 안에 통합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 사이의 첨예한 정치적 대립이 격화되면서 통일 구상은 곧 물거품이 되었고, 결국 북한과 남한은 각각 별개의 독립 국가로 나아갔다.
형식상으로는 자주 국가였지만, 두 나라는 점령국의 이념을 그대로 계승했다. 북한은 공산주의 체제를 굳혔고, 남한은 미군의 주둔을 통해 안보를 의존하는 구조가 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냉전의 최전선에서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은 38도선을 대규모로 넘어 남침을 감행했고, 준비가 덜 된 남한군은 순식간에 밀려났다. 공산 진영은 이 기세에 미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기를 기대했다.
유엔군의 참전과 부산 방어선의 위기
남한은 미국에 즉각적인 지원을 요청했다. 유엔 총회가 북한의 침공을 침략 행위로 규탄하면서, 이 전쟁은 '유엔군'이라는 공식적 형태를 띤 파병으로 전개되었다. 명목상 다국적군이었지만 실질적인 핵심은 미국의 육·해·공군력이었으며, 여기에 프랑스, 벨기에, 영국, 남아프리카공화국, 튀르키예, 그리스 등 여러 나라의 파병 부대가 합류했다.
그러나 이들 증원 병력은 한꺼번에 투입될 수 없었고, 도착과 전개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 남한의 상황은 비극으로 치닫고 있었다. 8월에 이르면 유엔군과 남한군은 한반도 남동쪽 끝, 부산을 중심으로 한 좁은 방어선(낙동강 방어선)만을 간신히 붙잡고 있을 뿐이었다.
항공 작전의 조건도 열악했다. 반도 내에서 사용할 수 있는 활주로는 부산 인근 대구의 비행장 하나뿐이었고, 부산 시내에는 임시로 두 개의 활주로가 정비된 정도였다. 미군 항공부대의 주력은 일본에 주둔하고 있었지만, 전선까지의 거리가 160~800km에 달해 출격 후 목표 상공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이 크게 제한되었다. 불과 몇 주 만에 이 작은 반도는 서방 진영이 치명적인 패배를 당할 수도 있는 대규모 대결의 무대로 변해 있었다.
냉전 격화와 항공 산업의 현실
한반도의 전쟁은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 진영 간의 대립에 기름을 붓는 결과가 되었다. 1949년 이미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했고 막대한 재래식 전력을 보유한 소련은 제트기의 대량 생산에 착수한 상태였다. 서방 역시 신형 전투기 개발을 추진하고는 있었지만, 전후 군축 분위기 속에 방위 예산은 크게 삭감되어 있었고 자금 부족도 심각했다.
서방의 항공 산업은 이러한 군축의 후유증을 고스란히 떠안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영국의 경우, 전성기 200만 명에 달했던 항공 관련 노동력이 14만 명 수준으로 급감해 있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시작된 한국전쟁은 이후 제트 전투기 시대를 여는 시험대가 되었고, 세계 항공 전력의 질적 변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