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과 일자리를 요구한 여성, 카타리나 유페미아
1954년 카타리나 유페미아(Catarina Eufémia)의 죽음은 포르투갈 알렌테주 지방 농촌 노동자들이 안토니우 살라자르 독재에 맞서 벌인 투쟁을 상징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카타리나 에피제니아 사비누 유페미아(Catarina Efigénia Sabino Eufémia), 흔히 카타리나 유페미아로 불린 그녀는 파시스트 독재자 안토니우 살라자르 치하에서 포르투갈 노동자들이 겪던 착취와 탄압에 저항하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1928년 알렌테주 지역 베자(Beja)현 발레이장(Baleizão) 마을에서 태어난 그녀는 농업 임금 노동자였으며, 세 명의 자녀를 둔 어머니였습니다. 1954년 5월 19일, 같은 마을에서 공화국 국민위병(GNR) 대원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일당 인상을 요구한 파업
카타리나 유페미아가 파시즘에 맞서는 투쟁의 상징이 된 계기는 1954년 5월 알렌테주 들판에서 벌어진 파업 참여였습니다. 이들은 지역 농촌 노동자들이 받는 '조르날(jornal, 일당)' 인상을 요구했습니다. 알렌테주 농촌의 투쟁은 1940년대 중반부터 점차 고조되고 있었고, 1954년 수확철이 시작되기 전 노동자들은 파업에 돌입했습니다. 지주들이 수확 작업을 위해 노동력이 절실하던 시기를 활용해 압박할 수 있는 유리한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노동자들의 요구는 일당을 16 에스쿠도에서 23 에스쿠도로 올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2013년 기준으로 환산하면 하루 임금이 8유로 센트에서 12유로 센트로 오르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그마저도 노동자의 생계를 겨우 보장할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알렌테주 지주들은 요구를 거부하고 오히려 다른 지역 노동자들을 고용해 파업을 분열시키려 했습니다.
"저는 빵과 일자리만 원합니다"
발레이장 마을에서 노동자들은 동원되었고, 카타리나 유페미아는 다른 14명의 노동자들과 함께 파업을 깨고 나온 노동자들에게 다가가 대화를 통해 파업에 동참시키려 했습니다. 파업 갈등이 이미 격화되고 있었기에 공화국 국민위병(GNR)이 살라자르의 정치경찰인 PIDE(국제국방경찰) 요원들과 함께 현장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여성들이 파업 파괴 노동자 집단에 접근하는 것을 눈치챈 GNR은 여성들을 심문했습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카라졸라(Carrajola) 중위가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을 때 카타리나 유페미아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저는 빵과 일자리만 원합니다." 무례하다고 여겨진 이 답변에 분노한 중위는 기관총 난사를 가했고, 총탄은 카타리나 유페미아에게 꽂혔습니다. 그녀는 여덟 달 된 아들을 품에 안은 채 그 자리에서 쓰러져 목숨을 잃었습니다.
죽음이 남긴 것
언론 검열 속에서도 그녀의 죽음은 나라 전체를 뒤흔들었습니다. 만약 살해되지 않았다면 카타리나 유페미아는 아마도 알렌테주의 수많은 여성 농촌 노동자들처럼 익명 속에 묻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과 그 파장은 지역 노동자들이 살라자르 폭력에 대한 저항을 이어가고 지주들의 착취에 맞서 투쟁할 결심을 굳히는 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알렌테주는 안토니우 살라자르 독재에 대한 저항의 주요 거점 중 하나였습니다. 1974년 4월 25일 카르나션 혁명 이후 알렌테주 노동자들은 국가의 승인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농지개혁을 단행하는 등 생활 조건 개선을 위한 가장 깊이 있는 투쟁을 벌였습니다. 알렌테주에서는 수백 개의 집단생산단위와 생산협동조합이 노동자들이 점거한 방치 농지 위에 세워져, 격렬한 사회 갈등기에도 농업 생산을 유지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포르투갈 공산당(PCP)은 카타리나 유페미아의 투쟁과 죽음의 기억에서 가장 큰 수혜자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죽을 당시 이미 당원이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공산당은 카타리나라는 순교자의 형상에 기대어 공산주의적 알렌테주, 즉 당의 요새라는 이미지를 유지하고자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