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파라과이 전쟁(1864~1870): 남미 역사상 최악의 분쟁, 삼국동맹 전쟁의 모든 것

파라과이 전쟁은 1864년부터 1870년까지 약 6년간 지속된 분쟁으로, 브라질·우루과이·아르헨티나가 '삼국동맹'을 결성해 파라과이와 맞선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19세기 후반 라플라타 강 유역 국가들 사이에 존재하던 상충하는 이해관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파라과이의 관점에서는 브라질이 우루과이 내전에 개입하기 위해 우루과이를 침공한 것이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고, 반면 브라질의 관점에서는 파라과이가 브라질 증기선 '마르케스 데 올린다(Marquês de Olinda)'호를 나포한 사건이 갈등의 불씨로 여겨집니다.

1864년 12월 파라과이군은 마투그로수를 공격했고, 1865년 5월에는 아르헨티나·브라질·우루과이가 삼국동맹 조약을 체결하며 동맹을 공식화했습니다. 파라과이는 결국 패배하였으며, 솔라노 로페스는 1870년 3월 전사하면서 전쟁이 막을 내렸습니다.

파라과이 전쟁의 원인

파라과이 전쟁은 브라질·우루과이·아르헨티나·파라과이 등 라플라타 유역 국가들이 국가 체제를 형성해 가던 과정에서 발생한 경제적·정치적 이해관계의 충돌이 낳은 결과였습니다. 특히 브라질과 파라과이 사이의 관계는 우루과이 내전을 둘러싼 이해 대립 속에서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파라과이 전쟁의 원인은 오랫동안 역사가들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거리였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미공개 문서를 바탕으로 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갈등의 원인에 대한 새로운 해석, 이른바 '새로운 역사학'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의 원인은 주로 1860년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파라과이 정부와 브라질 정부가 추구하는 이해관계의 차이가 오해와 충돌로 번졌고, 결국 파라과이가 브라질을 공격하는 국면으로 치달았습니다. 이러한 갈등은 1862년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가 파라과이의 독재자로 취임하면서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솔라노 로페스의 집권 이후 파라과이 정부는 연방주의자(federalistas)로 알려진 아르헨티나 반군 세력과 가까워졌습니다. 이 세력은 우르키사가 이끌었으며 엔트레리오스와 코리엔테스 주를 중심으로 활동했습니다. 파라과이가 연방주의자들과 접근하면서 우루과이의 블랑코당(백당) 정부와도 동맹을 맺을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습니다.

블랑코당과의 협력은 파라과이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 사용이 불가능했던 파라과이로서는 몬테비데오 항을 바다로 나가는 출구로 활용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파라과이의 연방주의자 접근은 당시 아르헨티나 대통령 바르톨로메 미트레 정부의 반감을 샀고, 우루과이 블랑코당과의 관계 강화는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양국 모두의 경계심을 자극했습니다.

브라질과 파라과이 정부 간의 긴장은 그 이전부터 파라과이 강 항행권을 둘러싼 협상 과정에서 이미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브라질 정부는 라플라타 유역 하천의 자유 항행을 요구했습니다. 당시 수도 리우데자네이루와 쿠이아바를 잇는 육로가 없어, 파라과이를 통과하는 하천이 쿠이아바로 향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양국 사이에는 영토 분쟁(현재 마투그로수두술에 해당하는 지역)도 존재했습니다.

브라질과 파라과이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틀어진 것은 1864년 파라과이가 우루과이 내전에 개입하면서였습니다. 당시 우루과이는 파라과이 정부와 동맹 관계에 있던 블랑코당이 집권하고 있었지만, 블랑코 정부의 경제 정책은 우루과이에서 활동하던 가우초 목장주들의 이익에 타격을 주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브라질 정부에 압력을 가해 우루과이 내 브라질 시민의 이익을 보호할 것을 요구했고, 브라질 정부는 1863년부터 블랑코당과 대립해 온 야당 콜로라도당(붉은당)의 지도자 베난시오 플로레스를 지원하며 무력 개입 의사를 밝혔습니다.

브라질이 콜로라도당을 지원해 우루과이를 침공할 가능성에 대해 파라과이 정부는 깊은 반감을 드러냈고, 브라질이 우루과이 분쟁에 개입할 경우 브라질을 공격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이러한 강경한 입장은 솔라노 로페스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 맞서 파라과이를 남미의 대안적 강국으로 부상시키려는 전략의 일환이었습니다.

그러나 브라질 정부는 파라과이의 최후통첩을 무시하고 1864년 9월 우루과이 침공을 단행했습니다. 브라질의 개입은 블랑코 정부의 붕괴로 이어졌고, 콜로라도당 지도자 베난시오 플로레스가 우루과이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됩니다.

전쟁의 도화선

브라질의 우루과이 개입에 분노한 파라과이 정부는 솔라노 로페스의 명에 따라 보복에 나섰습니다. 1864년 11월 11일, 브라질 선박 증기선 마르케스 데 올린다호가 신임 마투그로수 주지사 카네이루 데 캄푸스 대령과 자금을 실은 채 파라과이의 수도 아순시온에 도착했습니다. 파라과이 정부는 이 배가 무기를 운반하고 있다는 구실로 선박과 승무원 전원을 나포했습니다.

마르케스 데 올린다호의 나포에 브라질 정부가 항의하자, 파라과이는 브라질과의 외교 관계 단절과 함께 파라과이 영내 하천의 브라질 선박 통항 금지로 응수했습니다. 상황은 계속 긴장 상태를 유지했고, 브라질이 파라과이를 공격할 것이라고 판단한 솔라노 로페스는 1864년 12월 브라질에 대한 공격을 결정합니다.

1864년 12월 22일부터 24일 사이 약 7,700명의 파라과이 병사가 마투그로수로 진군했습니다. 12월 26일 파라과이군은 코임브라 요새를 공격했고, 28일에는 브라질군이 후퇴했습니다. 이 공격으로 파라과이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주요 지도자들

파라과이 전쟁에는 네 개국이 참전했으며, 수많은 인물들이 전쟁의 흐름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주요 인물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파라과이: 솔라노 로페스는 국가의 독재자이자 파라과이군 총사령관이었습니다. 그는 직접 전쟁을 지휘하다가 1870년 세루코라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 브라질: 페드루 2세 황제가 당시 브라질을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전쟁 중 브라질군을 이끈 양대 거성은 카시아스 공작(Duque de Caxias)과 데우 백작(Conde d'Eu)였습니다.
  • 아르헨티나: 바르톨로메 미트레가 분쟁 기간 아르헨티나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는 이 전쟁을 파라과이를 지지하던 연방주의자들을 제거하고 국내 지배력을 확고히 할 기회로 여겼습니다. 전쟁 중 그는 대통령직을 도밍고 사르미엔토에게 넘겼습니다.
  • 우루과이: 베난시오 플로레스가 우루과이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는 브라질이 우루과이를 침공한 뒤 정권을 잡은 콜로라도당의 지도자로, 1868년 암살될 때까지 집권했습니다.

주요 전투

마투그로수 주를 침공한 뒤, 파라과이군은 우루과이 내전에서 블랑코당을 지원하기 위해 히우그란지두술 방면으로 진격을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히우그란지두술과 우루과이에 도달하려면 파라과이군은 아르헨티나 영토, 즉 코리엔테스 주를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아르헨티나 정부가 통과를 거부하자, 솔라노 로페스의 명령에 따라 22,000명의 파라과이 병사가 아르헨티나를 침공했습니다. 이 침공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정부를 서로 가까워지게 만들었고, 그 결과물이 바로 삼국동맹 조약이었습니다.

이 조약에 따라 브라질·아르헨티나·우루과이(우루과이는 콜로라도당이 대표)는 솔라노 로페스에 맞서 힘을 합쳤습니다. 조약은 1865년 5월 1일 공식 서명되었으며, 전쟁은 솔라노 로페스의 실각까지 끝나지 않는다는 원칙이 확정되었습니다. 또한 세 동맹국은 새로운 국경 문제와 파라과이가 패배할 경우 지불할 배상금 문제도 논의했습니다.

솔라노 로페스가 히우그란지두술로 파병한 두 개 부대는 1865년 10월과 11월에 걸쳐 격퇴되어 파라과이로 철수했습니다. 이 시점부터 파라과이군의 전쟁 목표는 삼국동맹군의 침공으로부터 자국 영토를 방어하는 것으로 전환되었습니다.

파라과이 전쟁 초기의 첫 번째 큰 이정표는 1865년 6월의 히아슈엘루 해전(Batalha Naval do Riachuelo)이었습니다. 이 해전에서 브라질 해군은 파라과이 함대를 거의 궤멸시켰고, 그 결과 라플라타 유역 하천의 항행권을 장악하며 파라과이를 고립시키는 봉쇄를 성공적으로 시행했습니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전투는 쿠루파이티 전투입니다. 이 전투에서 삼국동맹군은 최소 4,000명의 병사 목숨을 잃는 참패를 당했습니다. 전쟁의 향방을 결정짓는 사건들은 1868년에 벌어졌는데, 그해 파라과이의 최대 요새였던 우마이타(Humaitá)가 브라질군에 함락되었습니다. 이후 1869년 1월에는 파라과이의 수도 아순시온이 침공당해 약탈당했습니다.

브라질군이 파라과이 영토 내륙으로 진격할수록 솔라노 로페스의 처지는 절망적으로 기울었습니다. 물자와 병력이 바닥난 파라과이 독재자는 어린이들까지 동원해 전선에 내몰았습니다. 1869년 8월 16일, 어린이와 청소년으로 편성된 파라과이 부대가 브라질군과 맞서 싸우게 됩니다.

이 전투는 아코스타 뉴 전투(Batalha do Campo Grande)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전투는 삼국동맹군이 솔라노 로페스를 추격·생포하려는 작전의 일부였으며, 8시간에 걸쳐 벌어졌고 파라과이군의 필사적인 저항이 돋보였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파라과이에게 재앙이었습니다.

조악한 무기로 무장하고 군사 훈련을 받지 못한 병사들로 구성된 파라과이군에게 8시간의 전투는 학살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역사가 프란시스코 도라치오투에 따르면 약 2,000명의 파라과이인이 사망했으며, 그중 다수가 어린이와 청소년이었습니다. 반면 동맹군의 사망자는 26명에 불과했습니다.

파라과이 전쟁의 결과

파라과이 전쟁은 1870년 3월 세루코라 전투에서 파라과이 독재자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가 브라질 병사들에게 살해되면서 완전히 종결되었습니다. 이 전쟁은 파라과이에 엄청난 폐허를 남겼고, 브라질 정부의 재정 적자를 심화시켰으며, 브라질 군주제 쇠퇴의 시작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패전국이 된 파라과이는 1876년까지 브라질군의 점령을 받았고,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 영토를 할양해야 했습니다. 파라과이 전쟁의 사망자 수는 논쟁의 여지가 있으나, 30만~45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며, 이중 약 20만 명이 민간인과 군인을 포함한 파라과이인이었습니다. 사망자 대부분은 전쟁 중 병사들과 주민들을 덮친 질병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참고 문헌

DORATIOTO, Francisco. A Guerra Maldita: nova história da Guerra do Paraguai. São Paulo: Companhia das Letras, 2002. p. 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