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과
통산 42기 격추
생애

이요조 후지타(藤田怡与蔵)는 단 하루에 10기 이상의 적기를 격추한 해군 조종사로는 단 두 명뿐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의사인 아버지와 조산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1917년 중국 산둥성 출신이다. 중학교 시절 해군 장교의 길에 눈을 돌리게 되었고, 우수한 학업 성적은 1938년 기수로 에타지마 해군병학교에 입교하는 발판이 되었다. 젊은 소위는 1940년 조종사 과정을 수료했다.
진주만 공격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격 당시, 후지타 소위는 항공모함 ‘소류(蒼龍)’에서 제2차 공격대를 호위하는 전투기 편대장으로 발진했다. 몇 차례 저고도 기관총 사격을 퍼부은 뒤, 그의 제로 전투기는 자신이 공격한 목표물 하나에서 터진 폭발의 충격파와 파편에 크게 휘몰렸다.
미드웨이 해전
일본 해군 항공대 조종사들은 제로 전투기에 대한 확고한 신뢰와 함께 고양된 사기로 1942년을 맞이했다. 당시 해군 조종사가 항공모함에 배속되려면 50~100시간의 비행 시간과 4~5회의 착함 경험이 필요했고, 함대에서 가장 젊은 조종사조차 최소 500시간의 비행 경력을 갖추고 있었다. 후지타는 그처럼 영광스러운 승리를 쌓아 온 정예 조종사들과 함께 미드웨이 해전에 참전했다.
그는 6월 4일, 일본 함대를 엄호하는 임무 수행 중 적 어뢰폭격기를 요격하며 흔들림 없는 자신감으로 전투에 뛰어들었다. 함대 레이더 요원의 무선 유도를 받아 적의 위치로 향한 후지타는, 적을 후방에서 공격하는 통념 대신 적 편대 안으로 곧장 돌진해 가르는 새로운 전술을 처음 시도했다. 기관총을 쏟아내며 적 편대를 관통한 그는 두세 대의 항공기가 연기를 두르고 추락하는 광경을 보고 스스로도 놀랐다.

“바로 이 방법이다!” 후지타는 외쳤다. 그는 같은 기동을 반복해 어뢰폭격기 4기(이 중 3기는 협동 격추)와 전투기 3기(이 중 2기는 협동 격추)를 추가로 격추했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그의 기체는 아군의 오사에 피탄되어 불시착할 수밖에 없었다. 거센 파도 위에 홀로 남겨진 그는 구조를 포기하고 죽음을 각오했으나, 다행히 물에 떠 있은 지 겨우 네 시간 만에 구축함에 의해 구조되었다.
“미드웨이 이후 살아남은 조종사 상당수가 교관으로 전출되며 최전선을 떠났습니다.” 후지타는 안타까워했다. “베테랑을 최전선 부대에서 빼내는 바람에 전투력이 무너졌고, 결국 그 대가는 젊은 조종사들에게 돌아왔습니다. 베테랑 조종사의 약 10%가 미드웨이에서 전사했다고 생각합니다.”
솔로몬·과달카날 전역
이후 후지타 대위는 항공모함 ‘히요(飛鷹)’의 분대장으로 배속되어 솔로몬 제도와 과달카날 전역에서 싸웠고, 1943년 11월에는 야기 카츠토시(八木勝利) 중좌의 지휘 아래 제301해군항공대(301空) 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전쟁의 끝
종전 전까지 후지타는 이오지마와 대만(포르모사) 상공의 전투, 그리고 일본 본토 방어전에 참가했다. 그는 후쿠치야마 기지에서 미군에 대한 최후의 반격을 준비하며 전쟁을 마쳤지만, 그 반격은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전과의 미스터리
후지타 소령이 격추한 항공기의 최종 숫자는 분명치 않다. 역사가들은 11기로 보지만, 다른 자료들은 42기로 추산한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전과는 7기였다.
전후의 삶
전쟁이 끝난 뒤 이요조 후지타는 일본항공(JAL)의 운항 조종사로 일하다 1978년 은퇴했다. 제로 조종사 협회 회장을 역임한 그는 1988년 미국 펜서콜라 해군항공기지에서 개최된 미드웨이 해전 심포지엄에 강연자로 초청되기도 했다. 그는 현재 도쿄에 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