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이 2세 드 부르봉(Louis II de Bourbon, 1621~1686), 흔히 '그랑 콩데(Grand Condé)'로 불리는 그는 파리에서 태어나 퐁텐블로(Fontainebleau)에서 생을 마감한 제4대 콩데 공작이다. 아버지 앙리 2세 드 콩데가 사망할 때까지는 앙기앙 공작(Duc d'Enghien)으로 칭해졌으며, 프랑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인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초년 시절과 결혼
그는 아버지를 보필하며 부르고뉴(Burgundy) 지방 통치를 경험하며 행정 실무를 익혔다. 1640년 피카르디(Picardy) 원정 중 아라스(Arras) 성벽 앞에서 벌어진 기병전에서 19세의 어린 나이에 처음 두각을 드러냈다. 파리로 돌아온 뒤인 1641년 2월, 그는 본인의 뜻에 반해 리슐리외(Richelieu) 추기경의 조카인 클레망스 드 마예-브레제(Clémence de Maillé-Brézé)와 혼인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결혼 전부터 누이인 롱빌 공작부인 저택에서 만났던 마르트 뒤 비장(Marthe du Vigean)과의 관계를 이어갔다.
로크루아 전투, 스페인 패권의 종언
리슐리외 사후, 그의 유지에 따라 콩데는 스페인군을 프랑스 북부 국경에서 몰아내는 임무를 맡은 피카르디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보병 15,000명과 기병 6,000명을 이끌고 포위당한 로크루아(Rocroi) 구원에 나선 그는 1643년, 개활지에서 유명한 테르시오(tercio) 연대를 포함한 27,000명의 스페인군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콩데의 젊은 나이와 루이 13세가 방금 서거한 프랑스의 극적인 정세는 이 승리를 더욱 빛나게 했다. 이 전승은 130년간 이어져 온 스페인의 군사적 패권에 종언을 고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앙기앙 공작은 이어 티옹빌(Thionville)을 함락시키며 성공을 굳혔다.
독일·플란더스 전역과 명성의 정점
이듬해 그는 튀렌(Turenne)과 합류해 독일 방면군에서 활약하며 1644년 험난한 프리부르(Fribourg) 전투에서 메르시(Mercy)를 격파했다. 이 승리에 힘입어 라인 강 좌안 전역과 마인츠(Mainz)가 점령되었다. 1645년에는 튀렌과 함께 빔펜(Wimpfen)에서 네카르(Neckar) 강 도하를 강행하고, 제국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였던 바이에른군을 뇌르들링겐(Nördlingen)에서 무찔렀다. 1646년에는 가스통 도를레앙(Gaston d'Orléans)의 뒤를 이어 플란더스군 사령관이 되었고, 역시 승전을 거듭하며 됭케르크(Dunkirk)의 항복을 받아냈다.
같은 해 아버지의 사망으로 콩데 공작위를 계승하며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았다. 그의 세력이 커지자 마자랭(Mazarin)은 그를 궁정에서 멀리하기 위해 카탈루냐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콩데는 1647년 레리다(Lérida) 공방전에서 실패를 맛보았다.
렌스 전투와 프롱드의 난
1648년 플란더스로 소환된 그는 입프르(Ypres)를 점령하고 렌스(Lens) 전투에서 '스페인 왕의 무시무시한 보병'의 잔존 병력을 궤멸시켰다. 이 결정적 승리 직후 제국은 베스트팔렌 조약(Treaties of Westphalia)에 서명했다.
그러나 스페인과의 전쟁은 계속되었고, 프랑스 내전인 프롱드(Fronde)의 난으로 국내 정세는 더욱 복잡해졌다. 콩데는 자신의 뜨거운 기질 그대로 이 소용돌이에 뛰어들었다. 의회파 프롱드에 맞서 처음에는 왕비와 마자랭에게 협력을 제안해 파리를 포위하고(샤랑통 전투) 의회파에게 뢰유 화약(Peace of Rueil) 체결을 강요했다. 그러나 궁정의 구세주를 자처하며 오만한 행보를 걷고 마자랭을 모욕하면서 백성들의 미움을 샀다.
체포와 석방
결국 왕비와 마자랭은 1650년 1월 18일, 콩티(Conti) 공작과 롱빌(Longueville) 공작과 함께 그를 체포했다. 세 왕자는 뱅센(Vincennes)에 유폐된 뒤 르아브르(Le Havre)로 옮겨졌다. 그러나 파리는 왕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들고일어났고, 일부 지방도 공개 반란에 돌입했다. 의회파 프롱드와 왕자파 프롱드의 연합에 직면한 마자랭은 결국 굴복하여 직접 르아브르로 가 수감자들을 석방했다. 사실 그는 귀족과 관료층(robin)의 동맹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실제로 콩데가 이끈 '왕자파 프롱드'는 머지않아 의회의 '구(舊) 프롱드'와 결별했다. 마자랭의 진언에 따라 왕비는 콩데에 맞서 구프롱드와 손을 잡았고, 콩데는 반발해 스페인과 동맹을 맺었다. 그는 자신의 관할지인 보르도(Bordeaux)에 자리 잡고 남부를 휩쓸었으며, 1652년 4월 7일 오를레앙 근교 블레노(Bléneau)에서 튀렌이 지휘하는 왕립군을 격파했다. 두 군대는 다시 파리 성문 앞에서 충돌했다.
파우부르 생앙투안 전투와 몰락
1652년 7월 2일 파우부르 생앙투안(Faubourg Saint-Antoine) 전투에서 궤멸 직전까지 몰린 콩데는 그랑 마드므아젤(la Grande Mademoiselle)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그녀가 파리 성벽 위에서 왕군을 향해 포격을 명령하고 수도의 성문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혼란스럽고 교만한 정책 탓에 콩데는 전쟁에 지친 부르주아와 의회파의 지지를 금세 잃었다. 그는 테러로만 권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고(7월 4일 시청(Hôtel de Ville) 학살), 끝내 10월 13일 — 루이 14세가 파리로 귀환하기 8일 전 — 도주했다. 그는 아블롱(Ablon)에서 스페인군에 합류했다. 왕실 선언으로 의회에 그에 대한 재판 착수가 명령되는 동안, 그는 마자랭에 대한 증오 때문에 1653년 스페인군 지휘관직을 수락했고, 로크루아의 영광을 잊은 채 피레네 평화 조약 때까지 스페인 진영에서 싸웠다.
그는 프랑스 북부 주들을 유린했고, 스페인 최고사령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에서 스페인군을 이끌고 아라스까지 진격하며 자신에 대한 사형 선고에 응수했다. 그러나 운은 그를 등진 듯했다. 튀렌은 그에게 포위 해제를 강요했고, 여러 차례의 교전 끝에 1658년 뒤느(Dunes) 전투에서 마침내 그를 격파했다.
복권과 화려한 말년
콩데의 사면 문제는 피레네 평화 조약(Treaty of the Pyrenees) 이전 협상 과정에서 격렬한 논쟁거리였다. 마자랭은 결국 그의 재산과 지위 회복에 동의했다. 1660년 파리로 돌아온 콩데는 이후 완벽한 신하로 행동했으며, 조연 역할만을 맡았다. 여전히 그를 경계하던 국왕의 동의 아래 폴란드 왕위에도 출마했지만, 8년간(1660~1668) 이어진 협상은 실패로 끝났다.
그는 군사적 업적에서 가장 큰 만족을 얻었다. 상속 전쟁(War of Devolution) 당시에는 단 3주 만에 프랑슈콩테(Franche-Comté) 전역을 점령했고(1668년 2월), 네덜란드 전쟁에서는 라인 강 도하에서 영광을 드러냈으며, 베젤(Wesel) 등 여러 거점의 항복을 받아내고 1674년 세네프(Seneffe) 전투에서 오라녜 공작을 무찔렀다. 튀렌 사후에는 몽테쿠쿨리(Montecuccoli)에 맞서 알자스를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이것이 그의 마지막이자 또 한 번 승리한 원정이었다.
통풍에 깊이 시달리게 된 그는 상티니(Chantilly)로 은퇴했다. 건축가 만사르(Mansart)와 정원사 르노트르(Le Nôtre)가 이곳을 아름답게 꾸몄으며, 그는 계몽된 예술 후원자로서 보쉬에(Bossuet), 라신(Racine), 보아를로(Boileau), 몰리에르(Molière), 라브뤼예르(La Bruyère) 등 당대 최고의 문인들을 맞이하고 보호했다.
전설적일 만큼 못생긴 외모를 지녔던 이 대영주는 길고 격동적인 삶 동안 언제나 극심한 회의주의를 드러낸 자유분방한 귀족이었다. 그러나 생애의 마지막에는 보쉬에의 설득으로 마침내 개종했고, 보쉬에는 그의 장례식에서 이 위대한 전사의 인품을 기묘하게 이상화한 것으로 유명해진 장송 연설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