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프전은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 대한 대응으로, 1991년 초 미국이 주도하는 다국적 연합군과 이라크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이 전쟁은 미국 텔레비전 방송사가 폭격 장면을 실시간으로 중계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으며, 이는 전쟁 역사상 최초로 시청자들이 전장의 모습을 생중계로 접한 사례로 남았다.

걸프전의 배경과 원인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은 이라크 정부가 쿠웨이트 정부의 일부 행보에 불만을 품은 데서 비롯되었다.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하게 된 이유를 이해하려면, 먼저 이라크가 1990년 8월 2일 쿠웨이트를 침공하게 된 근본 원인을 살펴봐야 한다.
이란-이라크 전쟁의 여파
쿠웨이트 침공의 배경에는 19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의 후폭풍이 자리하고 있다. 이 전쟁은 1980년부터 1988년까지 양국 간에 벌어졌으며, 이라크의 이란 공격은 국제 사회가 1979년 이란에서 발생한 이슬람 혁명의 확산을 막기 위해 이라크를 도구로 활용한 측면도 있었다.
전쟁 기간 동안 이라크는 미국(이란 약화를 원했음)과 사우디아라비아·쿠웨이트(사담 후세인 정권에 대규모 차관을 제공)로부터 광범위한 지원을 받았다. 이러한 국제적 지원 덕분에 이라크는 패배를 면할 수 있었고, 전쟁은 영토 변동 없는 무승부, 즉 '전쟁 이전 상태(status quo ante bellum)'로 끝났다.
석유 가격과 쿠웨이트에 대한 분노
문제는 전쟁이 끝난 뒤 시작되었다. 전쟁 비용으로 이라크 경제는 심각한 위기에 빠졌고, 국가 수입을 늘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라크의 최대 수입원은 석유 판매였지만, 유가는 이라크 정부가 생각하기에 너무 낮은 수준이었다. 1990년 1월에는 배럴당 21달러에 거래되던 석유가 같은 해 한해가 지나지 않아 11달러까지 폭락했다.
이라크 정부는 쿠웨이트가 OPEC(석유수출국기구)이 정한 생산 할당량을 초과하여 석유를 시추하고 판매함으로써 유가 하락의 주범이라고 비난했다. 또한 쿠웨이트가 양국 접경 지역에 매우 가까운 유정에서 석유를 채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담 후세인을 진정으로 격분시킨 것은 쿠웨이트가 이란-이라크 전쟁 기간 빌려준 차관의 상환을 요구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사담 후세인은 이라크가 이란과 싸운 희생이 곧 쿠웨이트의 이익을 지켜준 것이라며 상환 요구를 용납할 수 없다고 여겼다.
침공 결정과 전략적 오판
이러한 요인들이 겹치면서 사담 후세인은 쿠웨이트를 향한 적대적 담론을 강화했다. 그는 쿠웨이트라는 작은 이웃 나라가 '역사적으로 이라크 영토'이며 이라크의 제19번째 주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쿠웨이트 침공은 1990년 8월 2일 시작되었다.
역사학자들은 사담 후세인의 이 결정을 전략적 실수로 평가한다. 이라크 정부는 미국이 절대 허용하지 않을 변수를 간과한 것이다. 쿠웨이트가 강대국으로 부상해 미국의 중동 핵심 동맹국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주권을 위협할 가능성, 그리고 쿠웨이트 병합으로 이라크가 세계 최대급 석유 보유국 중 하나로 도약한다는 점 모두 미국이 좌시하지 않을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걸프전의 경과와 결과
쿠웨이트 함락과 국제사회의 즉각적 대응
이라크군은 이란과의 긴 전쟁으로 세계 최대 규모 중 하나로 성장한 군대였기 때문에 쿠웨이트를 신속히 점령했다. 침공으로 쿠웨이트 왕실은 나라를 떠나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로 피신해야 했다.
침공 소식에 국제사회는 즉각 반응했다. 침공 당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결의안 660호를 채택해 이라크의 침공을 규탄하고 이라크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명령했다. 그러나 이라크군이 쿠웨이트에 계속 주둔하면서 미국과 영국군이 사우디아라비아에 상륙 배치되었다.
사우디아라비아에 주둔한 미영 연합군은 이라크군의 추가 남하, 즉 사우디 침공 가능성을 차단하는 목적으로 배치되었다. 이후 1990년 11월 29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새로운 결의안(결의안 678호)을 통과시키며 이라크군에게 1991년 1월 15일까지 쿠웨이트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42일간의 공중전과 100시간의 지상전
이라크 정부가 유엔의 결정을 계속 무시하자, 미국이 주도하는 다국적 연합군은 군사 행동에 나섰다. 1991년 1월 17일부터 이라크에 대한 공습이 개시되었고, 공중 작전은 42일간 지속되었다.
이 공습 장면들은 미국 방송사가 실시간으로 중계하면서 전 세계에 알려졌다. 공격 목표는 무기 생산 시설, 이라크군 지휘부, 통신 인프라 등 이라크군이 활용하는 전략 요충지였다.
공중 작전에 이어 1991년 2월 24일 지상 작전이 시작되었다. 미국의 노먼 슈워츠코프(Norman Schwarzkopf) 장군이 연합군을 지휘했으며, 지상전은 단 100시간 만에 종료되었다. 준비 부족 상태였던 이라크군은 신속히 패배해 이라크 본토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전쟁의 종식과 그 의미
마지막 이라크군이 쿠웨이트에서 철수한 1991년 2월 28일, 미국은 군사 공세를 중단하며 걸프전을 공식적으로 마무리했다. 일부에서는 미국이 사담 후세인 축출을 위해 이라크 본토까지 진격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사담 후세인 정권의 붕괴는 12년 뒤인 2003년에야 현실이 되었다.
1990~1991년 걸프전을 미국과 이라크 간 분쟁의 첫 번째 국면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이들에 따르면 2003년 이라크 침공이 두 번째 국면이며, 두 전쟁을 각각 제1차 걸프전(1990~1991)과 제2차 걸프전(2003)으로 구분할 수 있다. 반면 두 전쟁의 발생 원인이 완전히 별개이며 서로 무관하다는 이유로 이러한 구분에 반대하는 학자들도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