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오스왈도 크루즈: 브라질 공중보건의 아버지

오스왈도 크루즈(Oswaldo Cruz)는 브라질 공중보건 역사에 가장 큰 발자취를 남긴 위생학자입니다. 그는 리우데자네이루의 황열병을 사실상 근절한 방역 캠페인을 이끌었고, 흑사병(페스트)의 확산을 막기 위해 도시 전역의 쥐 박멸 작업을 추진했습니다. 나아가 1904년 '백신 반란'이라 불리는 대규모 민중 봉기를 촉발한 강제 종두(천연두 예방접종) 정책의 설계자이기도 했습니다.

출생과 유년기

오스왈도 곤살베스 크루즈는 1872년 8월 5일, 상파울루주의 작은 도시 상루이스두파라이팅가에서 태어났습니다. 가족은 의사였던 아버지 벤투 곤살베스, 어머니 아말리아 타보르 불리옹스 크루즈, 그리고 다섯 자매인 에우제니아, 아말리아, 알리스, 노에미, 오르텐시아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1877년, 오스왈도 크루즈의 가족은 부모님의 고향인 리우데자네이루로 이주했고, 아버지는 그곳에서 진료소를 열었습니다. 오스왈도는 수도의 학교에서 정규 교육을 받았으며, 청소년 시절 아버지의 뒤를 잇기로 결심해 1886년 의과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의학 경력

오스왈도 크루즈는 1892년 의학 학위를 받았지만, 같은 해 집안에 비극이 찾아왔습니다. 아버지가 신장염으로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이로 인해 그는 어머니와 자매들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가족 진료소에서 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같은 시기 그는 에밀리아 다 폰세카와 약혼하여 1893년 1월 5일 결혼했습니다. 진료소에서 일하는 것은 현실적인 선택이었지만, 그의 진정한 관심사는 어디까지나 미생물학과 감염병 연구 분야였습니다. 당시로서는 진료가 가장 안정적인 수입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장인이자 상인이었던 마누엘 다 폰세카는 사위의 커리어 발전에 큰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는 최신식 실험실을 마련해주고 파리 유학 자금까지 지원했습니다.

프랑스에 머무는 동안 오스왈도는 처가 집에 거주하며 파스퇴르 연구소(Institut Pasteur)와 독성학 연구소에서 미생물학, 세균학, 혈청요법 등을 깊이 있게 공부했습니다. 1899년 브라질로 돌아온 그는 리우데자네이루에 비뇨기과 진료소와 실험실을 열었습니다.

공중보건 활동의 시작

오스왈도 크루즈의 공중보건 분야 데뷔는 1894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파라이바 계곡에서 발생한 전염병 조사를 의뢰받은 것이 그 시작이었습니다.

개인 실험실에서 분석한 검체를 바탕으로 오스왈도 크루즈와 과학자들은 그 지역을 덮친 병이 콜레라임을 확인했습니다. 콜레라는 19세기 최악의 사망 원인 중 하나였던 질병입니다. 이 결론에 따라 리우데자네이루, 상파울루, 미나스제라이스 당국은 추가 유행을 막기 위해 위생 사업을 대폭 확대했습니다.

1899년에는 산투스에서 발생한 전염병 조사를 의뢰받았습니다. 며칠간의 조사 끝에 흑사병(페스트)의 존재가 확인되었고, 이에 당국은 당시 유일한 치료법이던 혈청요법에 투자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혈청은 프랑스에서 수입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의존을 줄이기 위해 두 개의 혈청치료 연구소가 설립되었습니다. 바로 상파울루의 부탕탕 연구소(Instituto Butantã)와 리우데자네이루의 연방혈청치료연구소(Instituto Soroterápico Federal)입니다. 오스왈도 크루즈는 1900년 브라질산 최초의 페스트 혈청 생산에 참여한 팀의 일원이었습니다.

공중보건총국에서의 활약

1903년, 리우데자네이루는 로드리게스 알베스 대통령이 구상하고 시장 페레이라 파수스가 실행하는 대대적인 도시 개조 사업을 겪고 있었습니다. 건축적 개조만큼이나 중요한 또 하나의 축이 바로 '위생'이었습니다.

20세기 초 리우데자네이루에서는 매년 수천 명이 천연두, 황열병, 흑사병 세 가지 전염병에 걸려 심각한 유행병이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이에 오스왈도 크루즈는 오늘날 보건부에 해당하는 공중보건총국(DGSP)의 책임자로 발탁되었고, 그의 목표는 이 세 가지 전염병의 근절이었습니다.

황열병과 흑사병의 경우, 방역은 각각의 매개체인 모기와 쥐를 상대로 진행되었습니다. 보건 요원들의 활동은 지나칠 만큼 강경했습니다. 방역반은 특히 빈민 지역의 가정을 일일이 방문해 모기 번식지와 쥐 서식처로 쓰일 만한 곳을 찾아 집안에 들이닥쳤습니다.

또한 질병의 도시 전역 확산을 막기 위해 공중보건총국은 환자들을 지정된 장소에 격리했습니다(부유층 시민은 예외였습니다). 건물주들에게는 재산을 청결하게 유지하고 보수 공사를 하도록 강제했으며, 기준을 지키지 않는 이들에게는 벌금이 부과되었습니다.

쥐의 경우, 주민들이 쥐를 잡아 보건 요원에게 가져다주면 현금 보상을 지급하는 방식도 동원되었습니다. 그 결과, 특히 황열병 방역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어 유행이 눈에 띄게 잦아들었습니다. 흑사병 방역 과정에서는 수천 마리의 쥐가 제거되었습니다.

백신 반란

마지막으로 남은 과제는 천연두였습니다. 높은 치명률을 보이며 20세기 초 수천 명을 앓아눕힌 감염병이었습니다. 이를 막기 위한 해법은 인구 대상 종두 캠페인이었고, 1904년 천연두 접종이 강제화된다는 내용이 발표되었습니다.

그러나 리우데자네이루 시민들은 정보 부족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강제 접종에 크게 반발했습니다. 수천 명이 실제로 접종을 받았음에도, 그 결과는 도시 전체를 뒤흔든 대규모 봉기였습니다. 1904년 11월 10일,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수도 곳곳에서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민중 봉기는 '백신 반란(Revolta da Vacina)'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으며, 며칠 후 상황은 진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수도의 물적 피해는 막대했고, 시위 과정에서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강제 접종 정책은 봉기 이후 철회되었습니다.

죽음

오스왈도 크루즈의 말년은 아버지를 앗아간 것과 같은 신장염에 시달렸습니다. 병세는 서서히 드러나 의사로서 일할 수 있는 시간을 갈수록 제한했습니다. 1909년 그는 공중보건총국을 떠났고, 1915년에는 오스왈도 크루즈 연구소(구 연방혈청치료연구소)에서도 물러났습니다.

건강을 위해 더 나은 환경을 찾아 페트로폴리스로 이주했고, 이후 그 도시의 시장으로 선출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병세 악화로 직무를 수행하지 못했고, 1917년 2월 11일 신부전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겨진 유산

오스왈도 크루즈가 이끌었던 연방혈청치료연구소는 그의 이름을 따 '오스왈도 크루즈 연구소(Fiocruz)'로 개칭되었으며, 오늘날 라틴아메리카 최대 규모의 의학·공중보건 연구기관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는 브라질에서 '공중보건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으며, 그의 얼굴은 구형 2000크루제이루 지폐에 새겨지기도 했습니다. 강제 접종 정책이 낳은 사회적 갈등에도 불구하고, 그가 구축한 방역 체계는 근대 브라질 공중보건의 토대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