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고드프루아 드 부용: 제1차 십자군의 영웅, 신화와 실체

생애 개요

1061년 벨기에 주나프(Genappe) 근교 바이지(Baisy)에서 태어나 1100년 예루살렘에서 생을 마감한 인물, 고드프루아 드 부용(Godefroid de Bouillon).

'완벽한 기독교 기사'라는 신화

하 로렌 공작, 안트베르펜 변경백, 그리고 부용 공작이었던 그는 오랫동안 완벽한 기독교 기사의 전형이자 모범적인 십자군, 제1차 십자군에 영감을 불어넣은 지도자이자 영웅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명성은 사실 과장된 것이었습니다. 연대기 작가 알베르 도익스(Albert d'Aix)와 기베르 드 노장(Guibert de Nogent)이 전기와 찬사를 구분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일종의 '빌려진 명성'이었던 셈입니다.

실제 인물상: 용감하지만 우유부단했던 귀족

오늘날 고드프루아 드 부용은 용감하고 충성심 깊으며 매우 독실한 인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종종 망설이며 결정을 미루는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평가됩니다. 그는 불로뉴 백작 외스타슈 2세(Eustache II)의 아들이며, 어머니를 통해 하 로렌 공작 고드프리 2세의 외손자로서 그의 뒤를 이어 공작위를 계승했습니다. 이 귀족은 주군인 독일 황제에게 충성을 다했는데, 작센인과의 전쟁에서도, 이탈리아 원정에서도 황제의 편에 서서 싸웠습니다.

제1차 십자군 원정

교황 우르바노 2세(Urban II)가 독일 황제의 영토에서는 직접 십자군 설교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하 로렌 지방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클뤼니 수도회의 수사들이 고드프루아에게 십자군 참여를 권유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플랑드르, 브라반트, 왈롱, 로렌, 라인 지역의 기사들을 이끈 부용 공작은 1096년 8월 남독일을 넘어 헝가리와 발칸 반도를 통과했습니다. 1097년 초에는 비잔티움(동로마) 측과 약간의 마찰을 겪었지만 아나톨리아에 무사히 도착했고, 그해 6월 마침내 니케아(Nicaea)가 함락되었습니다. 그리고 2년 후인 1099년 7월 15일, 고드프루아는 자신의 대업 중 가장 빛나는 순간, 즉 예루살렘 함락을 목격합니다.

왕관을 거부한 '성묘의 수호자'

툴루즈의 레몽(Raymond de Toulouse)이 철수한 뒤, 부용 공작은 7월 22일 동료 십자군 지도자들에 의해 최고 권력자로 추대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왕'이라는 칭호를 거절하고 성묘의 변호인, 즉 '수호자(defender)'라는 칭호만을 받아들였습니다. 당시 성직자들은 성지가 교회에 속하며, 십자군은 그곳을 지키는 세속 수호자에 불과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새로 임명된 이 '수호자'는 그럴 자격이 충분했습니다. 같은 해 8월, 그의 군대는 아스칼론(Ascalon) 전투에서 이집트 군대를 대파하는 데 성공했으니까요.

피사의 다임베르트와의 갈등

그러나 12월, 피사의 다임베르트(Daimbert)가 교황 특사 자격으로 성지에 도착하면서 상황이 복잡해집니다. 그는 스스로 예루살렘 총대주교로 선출되었고, 고드프루아에게 봉신 서약을 요구했으며 고드프루아는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다임베르트는 곧 명목상의 권력에 만족하지 않게 되었고, 예루살렘과 야파(Jaffa)에 대한 완전한 주권을 탐하기 시작했습니다.

미스터리로 남은 죽음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1100년 7월 18일, 고드프루아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일부 연대기는 그의 죽음이 의심스럽다고 기록하며 독살 가능성을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제1차 십자군의 영웅은 신화와 함께, 그리고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