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9년 11월 15일 브라질 공화국 선포(Proclamação da República)는 군주제를 무너뜨리고 브라질에 공화정을 수립한 결정적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1870년대 이후 브라질 군주제가 겪어온 장기적인 약화의 결과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게 불만을 표출한 집단은 군부였다.
군주제에 대한 음모는 내각 전복을 주도한 데오도로 다 폰세카(Deodoro da Fonseca) 원수의 가세로 결정적인 힘을 얻었다. 11월 15일, 정치적 움직임 속에 주제 두 파트로시니우(José do Patrocínio)가 리우데자네이루 시의회에서 공화국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군주제의 위기

공화국 선포는 제정의 위기와 브라질 사회에 새롭게 등장한 요구들을 수용하지 못한 무능력의 산물이었다. 이러한 불만들은 공화주의 운동으로 수렴되었고, 부분적인 계획과 부분적인 즉흥성이 결합된 쿠데타를 통해 브라질 군주제의 막을 내렸다.
브라질 군주제의 위기는 1870년대, 파라과이 전쟁(Guerra do Paraguai) 직후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브라질이 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군주제는 약화되었고, 1860년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새로운 정치적 재편이 본격적으로 정치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군주제 종식에 직접적 영향을 미친 두 주요 불만 세력은 정치 집단과 군부였다. 이들은 국가의 현대화와 새로운 정치 의제를 요구하며, 공화정을 근대적 대안이자 국가의 해법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군부의 불만
군부의 경우, 불만의 씨앗은 전쟁 이후 브라질 육군이 전문 기관으로 자리 잡으면서 싹텄다. 이는 군인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 조직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핵심 요구는 급여 인상과 진급 체계 개선이었다.
또한 군부는 정치적 의견 표명의 권리를 요구했는데, 자신들을 국가 수호의 책임자로 자임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브라질이 세속 국가가 아니라는 점에 대한 불만까지 더해지며, 이들은 프랑스 사회학자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의 실증주의(Positivismo)를 수용하게 되었다.
실증주의는 군부가 군주제를 비판하는 공식 담론이 되었다. 결국 대다수 군부는 한 통치자가 국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독재적 공화국을 통해 국가의 현대화를 이뤄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설상가상으로 군부의 불만은 사회의 다른 집단들에 의해 더욱 부추겨졌다.
정치적 불만
정치권에서는 특히 상파울루 주와 같은 지방에서 군주제에 대한 큰 불만이 존재했다. 그 원인은 정치적 과소대표성이었다. 경제적으로 이미 브라질의 핵심 주로 부상한 상파울루였으나, 정치적으로는 경제가 쇠퇴한 바이아, 페르남부쿠, 리우데자네이루 등에 비해 대표성이 턱없이 부족했다. 이는 상파울루 정치 엘리트들의 더 큰 참여 요구를 촉발시켰다.
사회학자 앙젤라 알론수(Ângela Alonso)는 도시의 신흥 집단이 정치적 발언권을 원했으나, 군주제의 정치 체제가 노골적으로 배제적이었기 때문에 좌절했다고 지적한다.[1] 자유파가 선거권 확대를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정반대였다. 1881년 사라이바 법(Lei Saraiva)은 브라질의 유권자 수를 대폭 축소시켰다.
이러한 군주제의 모순은 공화정을 브라질 발전의 대안으로 보는 불만 세력을 결집시켰다. 브라질 공화주의 강화의 중요한 계기는 1870년 상파울루 공화당(Partido Republicano Paulista - PRP)의 창당과 공화당 선언문(Manifesto Republicano)의 발표였다.
PRP는 급진 클럽(Clube Radical)을 모태로, 군주제 정치에 불만을 품은 상파울루 공화주의자들이 결성했다. 주된 이유는 권력의 중앙집중화와 지방 자치의 부재였다. 그러나 1873년 창당된 PRP는 3년 전 발표된 공화당 선언문 덕분에 가능했다.
이 선언문은 브라질 공화주의자들에게 등대 역할을 했다. 브라질의 큰 병폐가 군주제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며 중앙집권제를 비판하고, 연방제(Federalismo)를 국가 발전의 핵심 대안으로 제시했다. 지방 자치권 보장을 위한 연방주의는 브라질 공화파의 핵심 구호가 되었다.
기타 주요 요구사항
당시 또 다른 중요한 요구는 브라질의 정교분리(세속 국가 수립)와 노예제 폐지 운동(Abolicionismo)이었다. 1880년대 브라질 사회를 뒤흔든 폐지 운동가의 대다수는 공화주의자였고, 이들의 운동은 자연스럽게 공화정 수립으로 기울어졌다.
마지막으로 왕위 계승 문제에 대한 불만도 컸다. 이사벨 공주(Princesa Isabel)가 제위에 오르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인식이 팽팽했고, 그녀의 남편인 프랑스인 외젠 백작(Conde d'Eu)이 황제가 될 가능성도 환영받지 못했다. 장남을 즉위시키는 방안이 거론되었으나 진전되지 못했다.
음모와 쿠데타
이처럼 군주제를 향한 불만은 다층적이었고, 앙젤라 알론수의 말처럼 "중첩된 정치적 위기와 사회적 동원이 정권 교체에 유리한 국면을 조성했다"[2]. 그녀는 1889년 당시 논점은 군주제가 무너질 것인가가 아니라 언제 무너질 것인가였다고 단언한다.[2]
공화정을 옹호하는 협회와 단체들이 거리 시위를 벌이고, 당대 신문들이 이 이상을 전파했다. 1889년 7월 군주제가 시위를 금지시켰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민간과 군부 양쪽에서 군주제 전복 음모가 진행되었다.
벤자민 콘스탄치(Benjamin Constant), 킨티누 보카이우바(Quintino Bocaiúva), 안토니우 다 실바 자르당(Antônio da Silva Jardim), 주제 두 파트로시니우 등이 공화정 수립을 위해 움직였다. 군부 내부의 동요도 심해져 1889년 11월 리우데자네이루에는 군사 봉기 소문이 파다했다.
공화국 선포의 전개

공화국 선포는 민간이 가담한 군부 주도의 쿠데타였으며, 부분적으로는 계획되었고 부분적으로는 즉흥적이었다. 11월 초, 음모 소문이 정점에 달했을 때 결정적인 전환점은 데오도로 다 폰세카 원수의 가세였다.
11월 10일, 공화파 인사들(후이 바르보사, 벤자민 콘스탄치, 아리스치데스 로보 등)이 원수의 집을 방문해 오루 프레투 자작(Visconde de Ouro Preto) 내각 총리 퇴진 운동에 동참할 것을 설득했다. 원수는 여러 소문을 근거로 한 논리 끝에 쿠데타 참여를 결심했다.
원수의 가세 목적은 오루 프레투 자작 내각의 해임이었다. 역사학자 앙젤라 알론수는 공화국 선포 사건을 1889년 11월 14일 시작되어 81시간 동안 지속된 8개의 국면으로 분석했다[3]:
- 민군 봉기의 발발
- 내각 축출
- 왕당파의 반동
- 공공 공간 동원 및 공화국 선포
- 공화정 정부 구성
- 왕당파 내각 구성 시도
- 황실 포위 및 임시 정부 장악
- 왕조 추방
이 흐름 속에서 쿠데타의 실행일은 1889년 11월 15일이었다. 그러나 관련 행동은 14일, 쿠데타 참여를 유도하기 위한 허위 정보(가짜 뉴스) 유포로 시작되어 일부 군부대를 움직이게 했다.
15일, 데오도로 다 폰세카가 이끄는 부대가 산타나 야영지(Campo de Santana) 본부를 포위했다. 그는 오루 프레투 자작과 법무장관 칸지두 지 올리베이라(Cândido de Oliveira)의 체포를 명령했다. 체포 후 원수는 황제를 칭송하며 자택으로 돌아가 페드루 2세(D. Pedro II)가 새 내각을 구성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황제의 내각 구성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사이 음모 가담자들은 이 상황을 공화국 선포로 몰고 가기 위해 행동했다. 15일 오후, 시의회 또는 상원에서 공화국을 선포하자는 제안이 나왔고, 시의회 회의에서 선포하기로 결정되었다. 이 자리에서 주제 두 파트로시니우가 브라질 공화국을 공식 선포했다.
거리에서는 음모 가담자들이 주도하는 퍼레이드와 환호 속에 축하 행렬이 이어졌으며, 대중의 참여도 목격되었다. 왕당파의 저항 시도(외젠 백작, 안드레 헤보사스 등)도 있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페트로폴리스(Petrópolis)에 있던 페드루 2세 황제가 새 내각 구성을 시도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공화파는 임시 정부를 구성했다.
임시 정부는 음모 주요 가담자들로 꾸려졌다. 킨티누 보카이우바(외무), 벤자민 콘스탄치(육군), 아리스치데스 로보(내무), 후이 바르보사(재무) 등이 입각했고, 데오도로 다 폰세카 원수가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마침내 황실은 브라질에서 추방당했다. 11월 16일, 24시간 내 출국 명령이 내려졌고, 임시 정부령으로 5,000 콘투 드 헤이스(réis) 지급이 결정되었으나 12월 철회되었다. 11월 17일, 황실 일가는 리스본행 배에 올랐다.
결과와 역사적 의의
공화국 선포는 브라질 역사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이었으며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주요 성과는 다음과 같다:
- 공화정 수립
- 연방제 실시
- 보통선거권(남성) 도입 및 센서스 투표제 폐지
- 세속 국가 수립(정교분리)
- 대통령제 채택
1890년대는 왕당파와 공화파의 대립, 그리고 새로 수립된 공화정 내에서 권력을 둘러싼 다양한 정치 세력 간의 갈등으로 점철된 분쟁의 10년이었다.
참고 문헌
[1] ALONSO, Angela. 브라질 공화정의 수립. In: SCHWARCZ, Lília M.; STARLING, Heloísa M. (org.). 공화정 사전: 51개의 비판적 텍스트. 상파울루: Companhia das Letras, 2019. p. 164.
[2] Ibidem, p. 166.
[3] Ibidem, p. 167-171.
이미지 출처
[1] Comm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