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은 1980년대 두 차례 임기를 수행한 미국 제40대 대통령입니다. 그의 행정부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으며, 그 결과 노동자의 처우가 약화되고 사회 불평등이 심화되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또한 공산주의와의 대립은 그의 행정부의 핵심 과제 중 하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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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년 시절
로널드 윌슨 레이건은 1911년 2월 6일, 일리노이주의 작은 마을 탬피코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존 에드워드 레이건은 신발 판매원이었고, 어머니는 넬 윌슨 레이건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존 닐 레이건이라는 형제가 한 명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레이건은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일리노이주의 여러 도시를 전전해야 했습니다. 1920년 가족이 딕슨에 정착하면서 그곳에서 몇 년을 보냈고, 지역 학교인 딕슨 고등학교(Dixon High School)에 다녀 1920년대 후반 학업을 마쳤습니다.
1929년에는 유리카 칼리지(Eureka College)에 입학하여 사회학과 경제학을 공부했으며, 1932년에 졸업한 뒤 곧바로 사회에 나가 진로를 모색했습니다.
방송 경력
레이건의 인생 첫 정식 직업은 스포츠 경기 중계 아나운서였습니다. 1932년 WOC-AM 방송국에 입사해 아이오와 대학교 경기 중계를 맡았고, 이후 아이오와주 데모인에 위치한 WHO-AM 방송국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곳에서 시카고 컵스 경기 중계를 담당하며 5년간 라디오 아나운서로 활동했고, 컵스 중계를 통해 전국적인 인지도를 얻게 되었습니다. 1937년 캘리포니아로 떠난 여행은 그의 인생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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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경력
이 여행 중 레이건은 워너 브라더스(Warner Brothers) 오디션을 보았고, 이를 계기로 7년간 해당 스튜디오 영화에 출연하는 계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초기 작품들은 저예산 영화였지만 점차 입지를 넓혀 1940년대 초 헐리우드에서 가장 잘 알려진 배우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데뷔작은 1937년작 Love is on the Air였으며, 1942년작 King's Row는 그가 출연한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영화 중 하나입니다. 총 53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1964년작 The Killers가 배우 생활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배우 경력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레이건은 군에 징집되어 대위까지 진급했지만, 근시 판정을 받아 최전선 배치가 부적합하다고 여겨져 후방 업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복무 기간 동안 레이건은 군이 제작한 영상물의 내레이션을 담당했고 일부 작품에도 출연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전역하여 민간인으로 돌아왔습니다.
전후 활동
전후 로널드 레이건은 미국 배우 노조인 스크린 액터스 길드(Screen Actors Guild) 회장을 역임했습니다. 1947년부터 1952년까지, 그리고 다시 1959년부터 1960년까지 이 자리를 지냈습니다. 노조 수장으로서 그는 자신의 핵심 성향 중 하나인 강한 반공주의를 이미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1947년 레이건은 미국 하원에서 증언하며 국내 예술계에서 공산주의가 확산되고 있다고 고발했습니다. 이 증언은 '헐리우드 블랙리스트' 시기와 맞물려 있었는데, 이 시기에는 공산주의자이거나 공산주의자로 의심받는 헐리우드 종사자들이 업계에서 배척당했습니다.
정치 입문 전 마지막 활동 중 하나는 제너럴 일렉트릭 시어터(General Electric Theater)였습니다. 1954년 이 회사에 합류해 8년간 몸담았으며, 이 기간 동안 TV 프로그램 진행과 더불어 동기부여 연설자로도 활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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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경력
레이건은 평생을 통틀어 정치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950년대에는 공화당 대통령 후보들의 선거 운동을 지원했고, 1960년대에는 미국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보수주의자 중 한 명으로 성장했습니다. 1962년에는 공화당에 당원으로 가입했습니다.
몇 년 후 출마를 권유받으면서 1966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당시 민주당 후보였던 현직 주지사 팻 브라운(Pat Brown)과 대결하여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레이건은 1967년부터 1975년까지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지냈습니다(1970년 재선에 도전해 민주당 후보 제세 언루(Jesse Unruh)를 물리쳤습니다). 캘리포니아에서 8년간 주정부를 이끈 뒤 레이건은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공화당 정치인 중 한 명이 되었지만, 대선 도전에서는 두 번 좌절을 겪었습니다.
1968년과 1976년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에 도전했으나 패배했습니다. 1968년에는 리처드 닉슨이, 1976년에는 제럴드 포드가 경선에서 승리했습니다. 1980년 경선에서야 비로소 레이건은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습니다.
레이건 행정부

1980년 대선에서 레이건은 현직 대통령이자 민주당 후보인 지미 카터와 대결했습니다. 선거 운동에서 조지 부시(부)를 러닝메이트로 발탁했고, 당시 미국 사회의 최대 현안이었던 높은 인플레이션과 실업률 상승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었습니다. 선거 운동은 성공적이었고 레이건은 압도적인 표 차이로 승리했습니다.
취임 두 달 만에 레이건은 암살 시도를 당해 총탄에 맞았습니다. 탄알이 튕겨 왼쪽 겨드랑이 근처에 명중했으며, 수술을 받고 2주간 입원한 끝에 회복되었습니다. 범인 존 힝클리 주니어(John Hinckley Jr.)는 심신미약을 이유로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재임 기간 동안 레이건은 세금을 감면하고 인플레이션과 실업률을 낮추는 데 성공했습니다. 반면 그의 정부에서 창출된 일자리는 상대적으로 불안정했는데, 노동 시간 증가와 임금 삭감으로 노동자의 처우가 악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사회 불평등은 심화되었고, 레이건은 신자유주의의 대표적인 옹호자로 기록되었습니다.
레이건은 매우 엄격한 반마약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강경한 반공 정책을 펼쳤습니다. '레이건 독트린(Reagan Doctrine)'으로 알려진 이 반공 정책은 정치 스캔들로 이어졌는데, 미국이 니카라과의 반혁명 게릴라를 지원하기 위해 이란에 비밀리에 무기를 판매했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1984년 레이건은 재선에 도전해 민주당 후보 월터 먼데일(Walter Mondale)을 상대로 손쉽게 승리했습니다. 그의 뒤를 이어 1988년 대선에서 승리한 공화당 정치인 조지 H. W. 부시(George H. W. Bush)가 취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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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
1994년, 83세가 된 레이건은 알츠하이머병 진단을 받고 말년을 이 질환과의 싸움 속에서 보냈습니다. 병은 해가 갈수록 악화되어 말기에는 아는 사람조차 거의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2004년 6월 5일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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