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7년 페르남부쿠 혁명이란?
페르남부쿠 혁명(Pernambuco Revolution)은 1817년 3월 브라질 헤시피(Recife)에서 발발한 분리주의·공화주의 성격의 반란으로, 지역 엘리트들의 불만을 폭발시킨 사건입니다. 이는 포르투갈 식민지 시대에 일어난 마지막 분리주의 운동이었으며, 지역 엘리트들이 주도했지만 시작과 동시에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습니다. 직접적인 원인은 1808년 포르투갈 왕실의 브라질 이전으로 인해 이 지역에서 벌어진 여러 변화였습니다.
페르남부쿠 혁명의 원인
1817년 페르남부쿠 혁명은 미나스 음모(Inconfidência Mineira), 바이아 음모(Baiana Conjuration)와 마찬가지로 식민지 시기 브라질에서 일어난 분리주의·공화주의 운동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두 운동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페르남부쿠 혁명이 단순한 음모 단계를 넘어 실제로 지역 권력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고 두 달 이상 그 권력을 유지했다는 것입니다.
이 운동은 당시 열악한 생활 조건에 대한 대중의 불만과, 특히 포르투갈 왕실과 이해관계가 충돌하던 지역 엘리트들의 반감에 의해 촉발되었습니다. 이러한 긴장은 계몽사상이 이 지역에 퍼지면서 더욱 증폭되었습니다.
페르남부쿠 혁명은 1808년 포르투갈 왕실의 브라질 도래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페르남부쿠 정착민들의 삶은 여러 면에서 변화했습니다. 첫째, 왕실의 사치를 유지하고 남부 시스플라티나(Cisplatina) 지역의 군사 작전을 재정 지원하기 위해 페르남부쿠의 세금이 크게 인상되었습니다.
왕실의 이러한 정책은 현지 목화 생산에 부과된 세금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더욱이 헤시피 주민들은 리우데자네이루 시의 가로등 설치 비용까지 세금으로 부담해야 했습니다. 세금 부담의 증가는 설탕과 목화라는 지역 경제의 두 축이 생산 감소로 위기에 빠져 있던 상황과 맞물려 커다란 불만을 낳았습니다.
여기에 더해 주앙 6세(D. João VI)는 1808년 자신과 함께 브라질로 온 여러 포르투갈인들을 페르남부쿠의 핵심 행정직과 군 요직에 임명했습니다. 이는 포르투갈 본국 출신들을 우대하는 조치로 인해 피해를 보던 지역 엘리트들의 반발을 샀습니다.
심각한 사회 불평등의 존재도 중요한 배경이었습니다. 이로 인한 불만은 대중 계층을 동원하는 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운동에 이념적 기반을 제공한 것은 계몽사상의 확산이었으며, 이는 프리메이슨 로지인 '이탐베 아레오파고스(Areópago de Itambé)'와 '올린다 신학교(Olinda Seminary)'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운동의 핵심 세력은 대상인들과 일부 대토지 소유주로 구성된 지역 엘리트였으며, 여기에 군인, 판사, 소상인, 장인, 그리고 수많은 사제들이 합류했습니다. 사제들의 대거 참여 덕분에 이 반란은 '신부들의 혁명(Revolution of the Fathers)'이라고도 불렸습니다.
또한 페르남부쿠 지역에는 페르남부쿠 봉기나 '마스카테스 전쟁(War of the Mascates)'처럼 오랜 반란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19세기 초에는 지역의 불만이 또 다른 왕실 반대 운동인 '수아수나스 음모(Conspiracy of Suassunas)'로 이어졌으나, 밀고로 인해 1801년 좌절되었습니다.
페르남부쿠 혁명의 발발
페르남부쿠 혁명은 1817년 3월 6일, 포르투갈 출신 마누엘 호아킹 바르보자 드 카스트루(Manoel Joaquim Barbosa de Castro) 준장이 음모 연루 혐의자 체포 명령을 수행하던 중 암살당하면서 실질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살해는 조제 드 바호스 리마(José de Barros Lima) 대위가 준장의 체포 시도에 맞서 저항하며 저지른 것이었습니다.
이 반란은 곧 헤시피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지역 총독은 브룸 요새(Forte do Brum)로 몸을 숨겼습니다. 이윽고 총독 카에타누 핀투 드 미란다 몬테네그루(Caetano Pinto de Miranda Montenegro)는 수도 리우데자네이루로 도피했습니다. 승리한 반군은 임시 정부(Provisional Government)를 수립하고 페르남부쿠에 여러 개혁 조치를 시행했습니다.

현재 페르남부쿠 주의 깃발은 페르남부쿠 혁명 당시 제작된 깃발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페르남부쿠 혁명의 지도자로는 도밍고스 조제 마르칭스(Domingos José Martins), 조제 드 바호스 리마, 크루즈 카부가(Cruz Cabugá), 주앙 리베이루 신부 등이 있었습니다. 임시 정부가 수립된 후 시행된 주요 조치는 다음과 같습니다.
- 페르남부쿠 카피타니아에서 공화국 선포
- 언론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 확립
- 주앙 6세가 신설한 세금 폐지
- 삼권분립(행정·입법·사법) 원칙 도입
- 군인 급여 인상
- 노예 노동제 유지
자유주의적 운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임시 정부의 조치들은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 건설보다는 지역 엘리트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보호하는 데 방점이 찍혀 있었습니다. 노예제 유지가 그 증거인데, 이 운동에는 노예제 폐지에 반대하는 대토지 소유주들도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페르남부쿠 혁명은 인접 카피타니아로 확산되어 파라이바, 히우그란지두노르치, 세아라에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운동 지도자들은 각지에 사절단을 파견해 지원을 요청했으며, 해외에도 손길을 뻗었습니다. 예를 들어 크루즈 카부가는 무기 구매, 용병 고용, 미국 정부의 지원 확보를 위해 80만 달러를 들고 미국으로 파견되었습니다.
왕실의 탄압
페르남부쿠 혁명은 포르투갈 왕실에 의해 강력하게 진압되었습니다. 반란 소식이 리우데자네이루에 전해지자 주앙 6세는 함대를 동원해 헤시피 항구를 봉쇄했습니다. 동시에 바이아에서 4천 명이 넘는 병력이 파견되어 페르남부쿠로 진격했습니다.
운동은 지도자들 간의 내부 분열로 약화되었고, 이로 인해 왕실군은 파라이바, 히우그란지두노르치, 세아라를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페르남부쿠에서의 봉기는 1817년 5월 20일, 헤시피 시가 침공당한 후 지도자들이 루이스 두 헤구 바레투(Luís do Rego Barreto) 장군에게 항복하면서 종결되었습니다.
주앙 6세의 명령에 따라 운동 지도자들은 본보기로서의 처벌을 받았습니다. 모두 9명이 교수형에 처해졌고, 4명은 당시 총살형에 해당하는 처형을 당했습니다. 연루자 중 한 명인 주앙 리베이루 신부는 체포되기 직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크루즈 카부가는 운동 실패 소식을 접한 뒤 브라질로 돌아오지 않고 미국에 남았습니다.
페르남부쿠 봉기의 최대 지도자였던 도밍고스 조제 마르칭스는 총살형에 처해졌고, 다른 지도자들도 극심한 고문과 처형을 겪었습니다. 조제 드 바호스 리마 대위는 교수형에 처해진 뒤 손과 머리가 잘려 전시되었고, 시신은 헤시피 거리를 끌려 다녔습니다. 주앙 리베이루 신부와 비가리우 테노리우(Vigário Tenório)의 시신도 같은 운명을 겪었습니다. 그 외 연루자들은 수년간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