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과 외교 공방
살라미스 해전 이후 페르시아의 새로운 총사령관 마르도니오스는 '패한 것은 키프로스인, 페니키아인, 크니도스인, 이집트인들일 뿐, 싸워보지도 못한 페르시아인은 아니었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크세르크세스 1세가 철수한 뒤에도 페르시아가 전쟁을 지속하려는 의지가 여전히 강하다는 점을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마르도니오스는 악천후 계절이 다가오며 작전 지속이 어렵다고 판단해 테살리아에서 겨울을 넘기기로 합니다. 이 기간을 활용해 그는 아테네를 동맹 진영에서 분리시키기 위해 치열한 외교 공작을 벌였습니다. 마케도니아 왕자 알렉산드로스가 이끄는 사절단이 아테네에 파견되었지만, 아테네인들은 '태양이 지금의 길을 걷는 한' 페르시아 왕과 동맹을 맺지 않겠다고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불안해진 스파르타 역시 아테네의 결의를 확인하고자 사절단을 보냈습니다. 분노한 아테네인들의 반응이 워낙 차가워 그들의 결심이 흔들리는 것 아닌가 의심될 정도였지만, 아테네인들은 '같은 그리스인으로서 같은 피와 언어를 공유하고, 공동의 성소와 제사, 비슷한 풍습을 지닌다'는 사실이 배신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명확히 밝혔습니다.
적대 행위의 재개
봄이 되자 마르도니오스는 다시 아티카를 침공했고, 주민들은 또다시 도시를 떠났으며 아테네는 재점령된 뒤 페르시아군은 보이오티아에 주둔했습니다. 한편 기원전 479년 봄, 스파르타의 섭정이자 레오니다스 1세의 조카인 파우사니아스가 이끄는 펠로폰네소스 연합군이 결성되었습니다.
연합군에는 스파르타 호플리테스(중장보병) 약 1만 명과 보조병 3만~3만 5천 명, 아테네군 8천 명, 그리고 코린토스, 에피다우로스, 메가라, 플라타이아, 트로이젠, 칼키스, 플리우스, 아이기나 등 그리스 각 폴리스에서 온 수천 명의 병력이 포함되었습니다. 그리스군 총 병력은 약 11만 명으로 페르시아군의 3분의 1 수준이었지만, 이미 살라미스에서 입증되었듯이 숫자의 열세 자체는 결정적인 불리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는 그리스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군대 집결이었으며, 실제 수치는 상당히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스군은 코린토스 지협을 건너 엘레우시스 인근에 도착한 뒤 보이오티아로 진입했습니다. 마르도니오스는 기병 운용에 유리한 테베 남쪽, 플라타이아 근처를 전장으로 선택했습니다. 맞서 그리스 연합군은 우익에 스파르타군을, 좌익에 아테네군을 배치했습니다.
전투 경과
파우사니아스는 적의 약점을 간파하는 현명한 장군으로 평가받았지만, 마르도니오스 역시 뛰어난 전술가이자 페르시아 최고의 장군으로 꼽혔습니다. 게다가 크세르크세스 1세가 본국으로 떠난 덕분에 그는 전투를 마음대로 지휘할 수 있는 전권을 쥐게 되었습니다. 두 장군 모두 상대가 먼저 자신의 진지를 공격하도록 유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초기에 파우사니아스는 키타이론산 기슭에 진지를 구축했고, 마르도니오스는 아소포스 강 건너편에 요새화된 진영을 세웠습니다. 페르시아 기병의 그리스 진지 공격은 실패했지만, 마르도니오스는 상대의 보급선과 물 공급원을 끊임없이 공격하게 했습니다. 이에 파우사니아스는 진지를 평야 쪽으로 옮겨 작은 구릉지대가 적 기병의 정면 돌격으로부터 군대를 보호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열흘이 지나자 물과 식량 부족으로 파우사니아스는 밤중에 보급이 용이한 예전 방어선 근처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철수는 혼란 속에서 이루어졌고, 그리스 부대들은 서로 접촉을 잃고 말았습니다.
마르도니오스의 치명적 오판
바로 이때 마르도니오스는 치명적인 판단 착오를 저지릅니다. 그리스 진영 내부의 갈등이 커져 스스로 분열되기를 기다리는 대신, 그리스군의 일시적 무질서를 틈타 기원전 479년 8월 27일 총공격을 감행한 것입니다.
페르시아군의 공격은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습니다. 특히 나머지 군대와 고립되었음에도 적 기병의 공격을 막아주는 고지를 점령한 스파르타군의 저항이 가장 강력했습니다. 바로 이 전투에서 마르도니오스가 전사합니다. 지휘관의 죽음, 이어진 요새 진영에 대한 공격, 그리고 페르시아의 동맹인 보이오티아군을 격파한 다른 그리스 부대의 합류가 더해지면서 페르시아군은 완패했고 대규모 학살을 당했습니다.
도망쳐 다른 페르시아 부대와 합류한 병사는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마르도니오스와 갈등을 빚던 아르타바조스가 이끄는 약 4만 명의 부대는 이미 헬레스폰토스 방면으로 철수 중이었습니다. 페르시아에 협력했던 테베는 곧 함락되어 지도자들이 처형되었습니다. 그리스군의 전사자는 약 3천 명으로 추정되지만, 페르시아군의 피해는 가늠조차 어렵습니다. 마르도니오스의 진영에서는 엄청난 전리품이 확보되었습니다.
전투의 역사적 의의
플라타이아 전투는 그리스 본토에서 벌어진 제2차 페르시아 침공의 종결을 의미했습니다. 같은 시기 소아시아 미칼레 곶에서 거둔 그리스 함대의 승리와 함께, 이 전투는 페르시아의 그리스 정복 야망을 사실상 좌절시켰으며, 이후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황금기를 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