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은 빠르게 시들고, 국제여단 자원병들에게는 새로운 비극이 시작된다. 스페인 내전에서 패배한 뒤, 이들에게 펼쳐진 것은 영웅적 귀환이 아니라 수용소와 감옥, 그리고 또 하나의 전쟁이었다.
프랑스, 또 하나의 철창
프랑스에서는 국경을 넘는 순간 외국인 의용병들이 베르네(Vernet), 구르(Gurs), 아르젤레쉬르메르(Argelès-sur-Mer) 등의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이들을 감시하는 것은 기동경비대와 세네갈 출신 병사들이었고, 수용소의 생활 조건은 극히 열악했다. 더욱 처절한 점은 이들 대부분이 더 이상 고향으로 돌아갈 길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비시 정부는 일부 수용자를 독일군에 넘겨버렸다. 그러나 일부는 살아남아 새로운 싸움에 뛰어들었다. 유고슬라비아인들은 조국으로 돌아가 티토의 게릴라 부대의 핵심 간부가 되었고, 또 다른 이들은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합류했다. 북아프리카의 수용소에 갇혔던 이들 상당수는 훗날 르클레르 사단에 대거 입대하여 나치에 맞서 싸웠다.
반면 프랑스인 의용병들의 처우는 가혹하기 짝이 없었다. '외국 군대에서 복무한 죄'를 지은 그들은 귀국하자마자 예비역 장교 신분을 박탈당하고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소련행 배의 운명
소련으로 피신했던 여단 출신들의 운명도 결코 나았지 않았다. 그중 상당수는 스탈린의 대숙청의 희생자가 되어 목숨을 잃었고, 이들이 결성한 우호 협회마저 해체되고 말았다. 드문 예외는 말리노프스키 장군이다. 그는 원수로 승진했고, 훗날 소련 국방장관까지 지내며 명예로운 말년을 보냈다.
동구권의 대숙청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유럽 인민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일부 여단 출신들이 요직에 앉기도 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들을 끝까지 경계했다. 그의 눈에 그들은 내전 시기 스페인이라는 '정치 문화의 온상'에 오염된 인간들이었기 때문이다.
1950년대 프라하와 부다페스트의 대형 재판정에는 여단의 생존자들이 줄지어 섰다. 헝가리 외무장관이었던 라슬로 라이크(László Rajk)는 '13세 때부터 배신자였다'고 자백하도록 강요당했고, 사후에야 겨우 명예를 회복했다. 체코슬로바키아 외무부 차관 아르투르 런던(Artur London)은 수년간의 감옥살이로 겨우 목숨을 건졌으며, 훗날 저서 『고백(The Confession)』에서 자신의 자백이 어떻게 강요된 것인지 고발했다.
예외는 동독이었다. 이곳에서는 상대적으로 많은 여단 출신들이 지휘 관직에 남아 있었을 뿐 아니라, 재판은커녕 오히려 예우받았다.
서방 세계의 반응
여단을 조직한 앙드레 마르티(André Marty)조차 오랫동안 영웅으로 추앙받던 프랑스 공산당에서 1953년 축출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자유주의 국가 영국은 스페인에서 싸우고 돌아온 자국민들에게 어떤 불이익도 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은 달랐다. '마녀사냥'이라 불린 매카시즘 시대에 스페인 참전 용사들은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가장 행운아는 멕시코로 피신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훌륭한 대접을 받았다.
54개국, 3만 5천 명의 희생
54개국에서 모인 3만 5천 명의 외국인이 국제여단에 입대했으며, 그중 6천 명이 넘는 이들이 전장에서 생명을 바쳤다. 그리고 살아남은 이들에게 기다리고 있던 것은, 전쟁보다 잔인할 수 있는 역사의 뒤통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