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의 지형

이곳은 완만하게 솟은 구릉지대로, 이날은 흙이 젖어 진창이 되어 있었다. 약간 경사진 이 땅은 가로 1킬로미터, 세로 2킬로미터에 불과한 좁은 사각형 공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운명은 바로 이 제한된 공간 안에서 결판이 나려 하고 있었다.
작센 원수의 배치와 치명적인 실수
작센 원수(Marshal de Saxe)는 병력을 앙투앙(Antoing)에서 배리 숲(Bois de Barry) 너머까지 펼쳐 배치했다. 포병 진지 두 곳은 하나는 포트누아(Fontenoy) 뒤에, 다른 하나는 프랑스군 좌익의 이 숲 앞면에 설치되었다. 중장비로 충실히 무장된 이 진지들은 거점 역할을 수행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작센은 — 전투가 끝난 뒤 스스로 인정하게 되지만 — 우리 군대의 승리마저 위태롭게 할 수 있었던 실수를 저질렀다. 포트누아와 배리 숲 사이 약 850미터 구간을 방어 시설로 보강하는 일을 소홀히 한 것이다. 연합군은 결국 바로 이 빈틈을 파고들며 몰려들었다.
루이 15세, 아들과 함께 싸우다
5월 10일 당시 루이 15세는 배리 숲에서 물러나 있었고, 왕이 곁에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군대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었다. 쾌활한 성격으로 알려진 왕은 즐겨 이런 말을 하곤 했다. 1356년 푸아티에 전투* 이후 프랑스 군주 중 아들과 함께 전장에 선 이는 없었으며, 성 루이(Saint Louis) 이래 영국과 벌이는 이토록 중요한 교전을 직접 지휘한 왕도 없었다고.
11일 이른 아침, 작센 원수가 마지막 지시를 계속 내리고 있는 동안, 왕은 도팽(왕세자)과 누아유 원수(Marshal de Noailles)* 등에 둘러싸인 채 노트르담오부아(Notre-Dame-au-Bois)에 마련된 지휘소로 향했다.
리슐리외 공작(Duke of Richelieu)*의 총괄 아래 프랑스 국왕의 안전은 철저히 보장되었다. 만일의 후퇴 상황에 대비해 스헬더 강(Scheldt) 위에는 교두보가 가설되었고, 무엇보다도 왕과 도팽, 그리고 그들의 측근 인사들의 신변 보호를 전담하는 정예 부대가 따로 배치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