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페르시아 전쟁
제1차 페르시아 전쟁은 그리스 역사에서 가장 상징적인 사건 중 하나입니다. 아테네가 페르시아 제국의 대규모 원정을 물리친 이 전쟁은 이후 서양 문명의 흐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492년 원정: 마르도니오스의 실패
다리우스 1세는 밀레토스 반란 때 아테네와 에레트리아가 보낸 도움—비록 미미했지만—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본토 그리스에 대한 응징 원정을 준비합니다. 이를 위해 사위인 마르도니오스에게 명하여, 이론상 속국이었으나 이오니아 반란 당시 페르시아 수비대가 철수했던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를 점령하게 했습니다.
기원전 492년 봄, 마르도니오스는 함대와 육군을 킬리키아에서 집결시켜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넌 뒤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통과했습니다. 함대는 타소스 섬으로 항해해 통행 대신 항복을 강요하고, 유럽 연안을 따라 아칸토스로 진격했습니다.
그러나 아토스산 곶을 돌던 중 격렬한 폭풍우를 만나 함대는 배의 절반을 상실했습니다. 이어 파이오니아계 부족들이 페르시아 진영을 기습해 추가로 많은 사상자를 냈습니다. 두 사건에서만 3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기록됩니다. 고대 자료의 병력 수치와 피해 규모는 종종 신뢰성이 떨어지므로 주의가 필요하지만, 마르도니오스가 철군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번 실패가 다리우스를 낙담시키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단지 다음 원정을 더욱 치밀하게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을 뿐입니다.
490년 페르시아 원정
기원전 491년 내내 이 공세를 위한 군사적·외교적 준비가 진행되었습니다. 여러 그리스 폴리스에 사절이 파견되어 항복을 요구했고, 일부 도시는 이에 응했습니다. 그러나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거부했으며,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페르시아 사절들을 처형까지 했지만, 정작 다가올 공세에 대비한 실질적 조치는 취하지 않았습니다.
다리우스의 조카 아르타페르네스(육군 지휘)와 다티스(함대 지휘)가 이끄는 페르시아군은 이번에는 에게해를 직접 가로질러 진격했습니다. 나소스와 델로스를 장악한 후(기원전 490년) 에우보이아섬과 아티카로 곧장 향한 것입니다.
병력은 자료에 따라 10만~20만으로 전해지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실제 숫자를 2만 5천~5만 명으로 추정합니다. 그것만으로도 당시 기준으로는 상당한 규모입니다. 페르시아 함대는 총 약 600척의 삼단 노선(트리레메)으로 구성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함대는 에우보이아 남단에 도달해 성문을 열기를 거부한 카리스토스를 유린한 뒤, 아테네 동맹에게 버려진 에레트리아를 파괴하고 주민들을 수사 인근의 아르데리카로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대왕의 복수의 첫 단추였습니다.
마라톤 전투
아테네의 전(前) 참주 히피아스의 조언에 따라 페르시아군은 기원전 490년 9월 초, 아테네에서 약 40km 떨어진 마라톤 평원에 인접한 약 4km 길이의 해변에 상륙했습니다. 아테네인들은 성벽 뒤에서 적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장군 밀티아데스가 이끄는 아테네와 플라타이아의 호플리테스 약 1만 명이 직접 페르시아군을 맞아 나선 것입니다.
9월 13일, 페르시아군은 육·해 양면에서 아테네를 공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기병을 포함한 일부 병력은 팔레론에 상륙하여 신속히 아크로폴리스에 도달하려는 목적으로 함선에 재탑승했습니다. 남은 약 2만 1천 명의 병력은 마라톤 평원을 가로질러 해안 늪으로 흐르는 작은 개울인 차라드라를 건너, 아테네군의 귀환로를 차단하려 했습니다.
플라타이아 동맹군과 함께한 아테네군은 펜텔리쿠스와 파르네스의 두 작은 고지를 점령하고 스파르타가 약속한 증원군을 기다렸으나, 증원은 더디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아테네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마라톤 평원에서 페르시아군을 격파한 뒤, 적 함대보다 먼저 아테네로 달려가 도시를 지켜야 했습니다.
밀티아데스의 전술
열 명의 아테네 장군 중 하나인 밀티아데스는 과거 스키타이 원정 때 페르시아군과 함께 싸운 경험 덕분에 그들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페르시아군은 서로 다른 출신의 병사들로 구성되어 방언조차 달랐고, 함께 싸워본 경험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버드나무 방패와 짧은 창으로 무장한 페르시아군은 백병전에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그리스인들의 무장은 중장보병, 즉 호플리테스의 것이었습니다. 투구, 방패, 흉갑, 정강이 보호대, 청동 각반으로 몸을 보호하고 검과 긴 창을 갖추었으며, 밀집 대열(파랑크스)로 싸워 방패가 앞에 벽을 이루었습니다.
밀티아데스는 폴레마르코스(군사 집정관) 칼리마코스를 설득하여 그리스군의 전선을 넓혀 수적 열세를 만회하고, 중앙을 얇게 하여 양익을 강화했습니다. 페르시아군은 최정예 부대를 중앙에 배치했으므로, 이를 포위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전투의 전개와 결과
그리하여 아테네군은 화살이 닿는 거리에 들어서자마자 돌격했습니다. 호플리테스의 중장비를 감안하면 당대 역사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1,500미터가 넘는 돌격을 감행했을 가능성은 낮습니다. 예상대로 페르시아군의 양익—제국 각지에서 징발된 산발적 부대와 사기가 낮은 이오니아인들—은 와해되어 패주하며 함선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그리스군의 중앙은 깊숙이 밀려 물러났습니다. 이때 양익에 배치된 그리스군은 패주하는 적의 추격을 멈추고, 페르시아군 중앙을 향해 완벽한 협공 기동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결국 페르시아 중앙부대마저 붕괴했습니다.
약 6,400명의 페르시아군이 전사했는데 대부분 도주 중 익사했으며, 함선 7척이 파괴된 반면 아테네인의 손실은 약 200명에 불과했습니다. 비록 페르시아군의 피해 수치가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이런 격차 자체는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와 동방 군대가 맞붙은 여러 전투에서 그리스 1명 사망당 동방군 20~30명의 비율이 자주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팔레론으로의 강행군
전투가 끝난 뒤에도 임무는 남아 있었습니다. 마라톤 전투 전에 이미 재탑승한 페르시아 최정예 부대의 제2차 공세를 저지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페르시아 함대가 수니온 곶을 돌아 팔레론에 도달하는 데는 약 10시간이 걸립니다. 전투를 마친 몸으로 7~8시간의 강행군을 벌인 그리스 호플리테스들은 적 함대보다 약 한 시간 먼저 도착했습니다. 페르시아군은 기동 실패를 확인하고 상륙을 포기했습니다. 이로써 제1차 페르시아 전쟁은 막을 내렸습니다.
이 전략적 승리는 그리스인들에게 상징이 되었고 아테네에 큰 위신을 안겼습니다. 반면 페르시아 입장에서는 주로 상륙 실패이자 사소한 좌절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의 원정은 에게해의 수많은 섬들을 다리우스 1세의 세력권 아래 넣는 데 성공했으니까요.
마라톤 경기의 유래
일부 역사가들에 따르면(헤로도토스는 이를 부정합니다), 바로 이때 페이디피피데스(또는 필리피데스)가 승리 소식을 알리기 위해 달렸고, 여기서 '마라톤'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올림픽 마라톤의 42.195km는 마라톤과 아테네 사이의 거리와 무관합니다. 첫 올림픽 마라톤이 열린 윈저 성에서 버킹엄 궁까지의 거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필리피데스의 일화의 진위와 무관하게, 이곳에서의 진정한 스포츠적 위업은 팔레론 상륙을 막기 위해 강행군을 벌인 아테네 호플리테스 전체의 집합적 성취였습니다.
다리우스의 죽음과 크세르크세스의 등장
패배에 대한 다리우스의 반응은 처음부터 복수와 새로운 원정 준비였습니다. 그런 거대 제국의 지배자가 한 번의 패배에 매몰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즈음 사트라프(총독) 아리안데스가 이끄는 이집트의 반란이 일어나 다리우스의 마지막 몇 달을 붙잡았습니다. 그는 기원전 486년에 사망했고,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가 뒤를 이으며 그리스 정복의 야망을 이어받았습니다.